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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신선이 사는 곳' 칭송 받던 600년 남산의 역사

■푸른 눈썹 같은 봉우리, 아름다운 남산

윤도준 지음, 일조각 펴냄





“남쪽 산은 자각봉처럼 빼어난 곳이 없는데(南山無如紫閣秀) 푸른 눈썹 같은 봉우리 높이 솟아 하늘도 지척이라네(翠眉浮天天尺咫)”

조선 제 22대 왕 정조는 1792년 한양의 모습을 담은 ‘성시전도’를 그리게 한 후 규장각 문신들에게 이를 소재로 시를 쓰게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아한 표현으로 평가 받는 문신 이덕무(1741~1793)는 ‘남산’을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자각’에 비유했다. 지난 10여년 간 거의 매일 남산을 오르고 있는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은 남산에 대한 애정을 남아 쓴 에세이집 제목을 이 시에서 빌린 표현을 붙여 ‘푸른 눈썹 같은 봉우리, 아름다운 남산’이라 지었다. “남산은 나의 뿌리, 나의 역사, 그리고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윤 회장은 항상 오르는 남산에서 오히려 새로움을 느낀다며 특히 ‘남산의 역사’를 시대 순으로 정리했다.

남산은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 천도를 결정하면서 우리 역사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풍수지리에 맞춰 자리잡은 경복궁의 안산인 남산의 그 시절 이름은 ‘목멱산’이었다. 이곳에 조성한 ‘목멱사’는 가물 때 기우제, 장마 늘어질 때 기청제를 지내는 국가 제사 시설이었다. 임금이나 왕자의 병이 위중할 때면 쾌차를 기원하는 제사도 지냈다. 하지만 연산군이 난잡하게 놀던 시절에는, 산에 오른 백성들이 왕의 채신머리 없는 모습을 알게 될까봐 두려워 민간인들의 남산 출입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저자는 옛날 이야기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은 친절한 말투로 아름답고 신성했던 남산의 역사를 읊는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조선이 문호개방을 하면서 일본은 남산에 조선신궁, 조선헌병대 사령부, 통감관저 등 종교시설과 주요 생정기관을 곳곳에 세웠다. 해방 후에도 남산은 경제 개발 등을 목적으로 훼손돼 갔다. 이후 산림녹화사업으로 남산은 점차 과거의 ‘푸른 눈썹 같은’ 아름다움을 되찾기 시작했고 관광지이자 휴식공간이 됐다.

저자는 2017년부터 남산 역사 탐방을 기획했다. 윤 회장은 자신의 역사 탐방길을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서 묵념으로 시작해 동쪽 방향으로 이동해 조선신궁이 있었던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단군굴, 경성신사 터(현 숭의여대)와 노기신사 터(현 리라초교와 남산원)를 거쳐 훗날 조선총독부 터(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통감관저 터(현 서울유스호스텔 입구)를 지나 한옥마을, 장춘단과 박문사(현 신라호텔 영빈관)가 있던 장충단공원에서 끝난다”고 소개했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남산을 통해 우리 역사와 뿌리를 알게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1만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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