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기운이 파랑을 만나 가로로 길게 뻗었다. 수평선을 뚫고 솟아오는 태양의 기운이 온 바다를 뒤덮은 듯했다. 상상은 자유다. 작품명은 ‘가보지 못한 와디럼’. 요르단 남부 사막지역 와디럼을 떠올리며 작업한 작가 이정란은 “붉은 사막을 상상하며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또 그었다”면서 “두 폭 작품을 아래위로 붙여 전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수행적이고 명상적인 선긋기를 통해 보이는 것 이면의 서정적 풍경을 그려내는 이정란의 개인전이 용산구 갤러리가비에서 22일까지 열린다.
추상의 미덕 중 하나는 상상의 자유다. 푸르스름한 자연의 기운, 하얗게 내려앉은 청명한 공기가 느껴지는 작품들은 각각 ‘초저녁의 안나푸르나’ ‘바람없는 안나푸르나’라는 제목이 붙었다. 설산(雪山) 봉우리로 가득한 안나푸르나의 아련한 풍광이 감지된다. 관객의 생각이 작가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 지점에서 공감의 쾌감이 퍼진다.
중년 늦깎이로 화업을 시작한 이 작가는 2000년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서브웨이 프로젝트’와 같은 해 부산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미디어아트에 몰두해 왔다. 평면 작업으로 돌아선 것은 2015년부터다.
“자 없이, 색연필 같은 평범하고 힘없어 보이는 재료로 덧없어 보이는 줄긋기 작업을 반복했고 몰입했습니다. 선은 홀로 있는 게 아니라 먼저 그어진 선과 다음에 그어질 선들을 염두에 두고 ‘배려하고 살피며’ 그어지게 됩니다. 공명(resonance)을 통해 영향을 주고 받지요.”
선을 채워갈수록 ‘나’는 비워졌다. 재료와 행위 연구는 해를 거듭하며 진화했다. 딱딱한 아크릴에 칼로 선을 그은 작업은 날카로운 첫인상을 가진 속깊은 사람처럼 우러나는 맛이 깊다. 미끄러운 표면을 긁는 과정에서 끽끽거리는 신경질적 소음이 발생하지만, 한 달 이상 걸리는 과정 속에 치유의 기운까지 담긴다. “단 한번 스친 작은 상처와 자국까지도 모조리 드러내는 게 이 작업의 특징”이라는 작가는 선 그은 자리에 물감으로 색을 먹여 의미를 덧입힌다.
최근에는 치과에서 사용하는 의료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뜯어낸 듯 거친 질감 속에 선이 더 다채롭게 표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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