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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교, 돌에서 생명을 불러낸 조각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회고전 '구도'

'돌 박사' 유영교의 종교주제 조각 40여 점

한국 전통 석조, 이탈리아 구상조각 自己化

심오한 주제도 구체적 형상 "누구나 이해"

유영교 '베드로의 소명' 중 세부.




“저, 저를 부르셨습니까?”

위대한 손가락이 자신을 지목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입. 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키는 사내의, 의구심과 확신이 교차하며 벌어진 그 입에서 당장에라도 놀라움의 말들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조각가 유영교(1946~2006)가 1982년에 포르투갈 산(産) 분홍 대리석을 깎아 만든 ‘베드로의 소명(召命)’이다. 펄쩍 뛰어오른 물고기 형상의 한쪽 다리가 어부 출신으로 예수의 제자가 된 베드로임을 암시한다. 유영교는 르네상스시대 미켈란젤로 때부터 ‘돌 조각 성지(聖地)’로 통하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카라라에서 터 잡고 작업한 첫 번째 한국인 조각가다.

유영교 '베드로의 소명' 중 인물상의 다리 부분.


유영교 '베드로의 소명' /사진제공=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이탈리아 피사의 집과 카라라 아래 지역인 피에트라산타의 작업장을 오가며 지내던 어느 날, 유영교는 미술사학도인 아내(이은기 목원대 명예교수)가 시험공부 하느라 들여다보던 카라바지오의 그림 ‘성 마태오를 부르심’을 눈여겨 봤다. 무슨 내용이냐 물었고, 아내는 “예수의 부르심에 세리(세금징수원)였던 마태오가 설마 자기를 불렀을까 하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켜 되묻는 모습”이라고 얘기했다. 며칠 후 작가는 분홍빛 고급 대리석을 깎아 제작한 ‘베드로의 소명’을 집으로 갖고 왔다.

유영교의 여러 작업 중에서도 종교적 주제의 조각들만 모은 회고전 ‘구도(求道)’가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3월 3일부터 26일까지 열렸다. 2008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유작전 이후 15년 만에 열린 대규모 전시이며,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처음 기획한 작고 작가 회고전이라 의미가 컸다. 1980년대 조각부터 자연석과 솟아나는 물을 접목한 말년작 ‘샘’까지 전 생애를 관통하는 작품 40여 점이 선보였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서 3월3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조각가 유영국 회고전 '구도(求道)' 전경.


■돌에서 생명을 불러냄


대리석 돌덩이에서 베드로를 끄집어 내었듯 유영교는 재료인 돌의 성질을 살펴 그에 적합한 인물을 불러내고 형상화 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한국 근현대 조각사를 두루 살펴도 유영교 만큼 다양한 석재를 자유자재로 다룬 조각가는 많지 않다.

이탈리아산 붉은 사암으로 만든 ‘구도자1’(1989)은 상대적으로 경도가 낮아 물컹한 돌 속에 깃들었던 생명을 호명해 낸 것만 같다. 과하게 부린 기교라곤 전혀 없다. 울음도 말씀도 목 안으로 꿀꺽 삼켜버린 듯한 수도승의 형용할 수 없는 표정 속에 수천 수만 가지 사연이 깃들어 있다. 전시를 함께 돌아본 이은기 교수는 “유영교 작가는 이탈리아로 유학가기 전 30대 초반부터 말년까지 꾸준히 구도자 연작을 제작했다”면서 “삶의 희로애락을 보는 듯한 이들 구도자의 표정은 법당의 근엄한 부처님보다는 도 닦는 과정의 나한상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분홍 대리석의 ‘구도자2’(1992)와 화강암으로 만든 ‘구도자3’ ‘구도자4’(1996)까지 작가는 재료의 기질에 맞춰 ‘배어나는’ 조각을 허락했다. 돌에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았기에 한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품들이 다채롭다.

유영교 '구도자1'


유영교 '구도자1' /사진제공=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확고한 신앙을 흔들고자 한 악마에 의해 몹쓸 피부병에 걸려 고통받은 ‘욥’(1982)은 응회암의 일종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트라베르티노에서 탄생했다. 돌의 자연스런 패임에서 욥이 겪은 괴로움과 견뎌낸 의지가 읽힌다. ‘천신과 싸우는 야곱’(1982)은 장자권을 갖게 축복해 달라며 천신에게 싸우다시피 매달린 야곱을 보여준다. 건축 자재로도 사용하는 거친 느낌의 붉은 대리석을 재료로 썼다. 격정적 장면과 고운 표면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거칠게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그 반복된 흔적에서 야곱 만큼이나 절박했을 작가의 절실함이 느껴진다. 김이순 홍익대 미술대학원 교수는 유영교의 조각에 대한 평론글에서 “토속적인 인물상을 추구할 때는 우리나라 화강암을 거칠게 쪼아 만들고, 고운 여인상은 이탈리아 대리석을 곱게 갈아 만들고, 풋풋한 모자상은 엷은 색의 대리석을 쪼고 갈아 다듬고, 격정적인 종교작품은 3겹 정으로 거칠게 쪼아 마치 붓 자국이 강한 회화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면서 “돌의 다양한 성질을 파악하고 이를 작품에 활용한 것으로 보아 ‘돌 박사(Dr.Stone)’라는 별명이 적절해 보인다…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의 미술을 아우르는 지난한 고투의 시간을 거쳐 얻어진 결과다”라고 적었다.

유영교 '천신과 싸우는 야곱'




유영교 '욥'


■궁극의 관심은 융합과 소통


1946년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서 태어난 유영교는 원래 홍익대 건축학과를 희망했으나, 2지망으로 선택한 조각과에 합격했고 인생 항로가 바뀌었다. 전뢰진 교수의 석조 수업시간을 가장 좋아하던 그는 대학 2학년이던 1966년 국전(國展)에 출품해 입선했다. 일찍이 이름을 날렸다. 1973년에는 ‘운영(雲影)’으로 국전 국무총리상을, 1974년에는 ‘운무(雲霧)’로 국회의장상을, 1975년 ‘화선’과 1976년 ‘자매’의 연거푸 특선까지 거머쥐었다. 그리하여 ‘국전 추천작가’가 되자 “국전을 졸업했다”라며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반추상과 추상의 변형이었다.

유영교 '얼굴1'


석굴암의 불상을 유독 좋아했고, 대학원 졸업 논문 주제는 ‘조선시대 왕릉의 석인석수상 연구’였다. 유학은 추상이 주류이던 미국이 아니라 구상조각의 대가들이 포진한 이탈리아를 택했다. 여러 좋은 것들 가운데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선별할 줄 아는 줏대있는 작가였다. 앞서 봤던 ‘베드로의 소명’이 그런 사례다. 아내이자 미술사학자인 이은기 교수는 “(작품을 제작하기) 얼마 전 이탈리아 북부 도시 파르마 세례당에서 베네데토 안텔라미의 ‘12달 조각상’을 봤는데, 직사각형 대리석에 높은 부조로 표현됐고 그 중 2월엔 인물 위에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다”면서 “인물 위쪽으로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스케치가 있고, 물고기에서 어부였던 베드로가 머리에 떠오른 듯하다. 죄 많은 ‘마태오를 부르심’의 주제를 생각하면서 물고기를 넣어 ‘베드로를 부르심’으로 변경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여러 고전에서 자신 만의 가치를 찾아낸 것이다.

유영교 '웅크린 여자'


유영교 '부처의 꺠달음과 바울의 회심'


기독교와 불교 도상이 공존하는 작업들은 숨은 뜻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부처와 나무, 말 탄 남자와 쏟아지는 햇빛이 대리석의 한 화면에 배치됐다. 보리수나무에서 득도한 석가모니, 번쩍이는 빛과 함께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박해자에서 사도가 된 바울을 떠올린 유족은 ‘부처의 깨달음과 바울의 회심’(1996)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같은 시기의 작품 ‘신전Ⅲ’에는 신전같은 작은 불감 안에 사과를 손에 들고 꿇어앉은 풍만한 여인과 눈길은 향하지만 외면하려 애쓰는 수도승이 나란히 등장한다. 뱀의 꼬임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와 미혹되지 않으려 수행하는 불자가 자연스레 연상된다.

시대와 지역, 추상과 구상, 기독교와 불교를 경계없이 넘나들었으나 유영교의 조각은 친근하다. 구상조각이기 때문이리라. 단순한 형태 속에 이야기를 담았다. 추상적인 주제여도 구체적인 형태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1983년의 인터뷰에서 구상적인 작품을 만드는 이유에 대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통을 추구한 작품이기에 지금도 유영교의 조각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유영교 '전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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