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화가의 눈으로 무대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캔버스나 종이 위보다는 무대 위에서 더 좋은 화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6년 만에 내한한 그리스 연출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가 12일부터 오는 14일까지 무대 위에서 신체와 시각예술을 결합한 공연인 ‘잉크’의 무대를 펼친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지난 1월 시작된 월드투어의 일환으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선보이는 것이다.
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파파이오아누는 “대사가 전혀 없는 작품이라 연극이라 부르기도, 안무로 동작을 구성한 것도 아니어서 무용이라고 부르기도 힘들다”면서 ‘잉크’의 장르를 규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신 물을 주 소재로 삼아 두 배우의 신체 움직임만으로 근원적 삶을 담아냈다. 정원용 호스와 플라스틱 판넬, 천으로 만든 문어 등 일상적 소품을 토대로 간결하게 꾸민 무대에서 일본 춘화의 문어나 그리스 신화에서 아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의 모습 같은 미술사적 장면도 재현된다.
파파이오아누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용해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한다”면서 “물이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부분도 좋다. 무대에 물이 존재했을 때 부정할 수 없는 리얼리티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그는 아테네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한 후 화가로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연출가 로버트 윌슨 등을 접하면서 공연 예술로 장르를 옮겨 대중을 조우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파파이오아누는 “신체 표현에 대한 갈증 때문에 춤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면서 “공연 예술을 통해 다른 예술가들이나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젊은 시절 미술가로 활동했을 때는 제 작품이 갤러리를 통해 유통돼 연령대와 계급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6년 에다포스 댄스 시어터를 창단한 데 이어 2004년에는 아테네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도 콘셉트 설정부터 연출뿐 아니라 무대를 만들고 의상·조명디자인도 담당했다. 공연에도 직접 출연한다.
‘잉크’라는 제목은 파파이오아누가 초연을 올리기 전 절친한 친구에게 부탁해 지어진 이름이다. 공연 속 중요한 오브제 중 하나인 문어가 검은 먹물을 뿜는 점이 남성의 신체적 요소로 이어지고, 인간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인 잉크로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신체적인 것이 영적, 정신적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점이 제 작품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파파이오아누와 해리스 프라굴리스가 더블캐스팅으로 연기하는 어른스러운 인물은 슈카 호른이 연기하는 생명력 넘치는 젊은 인물과 충돌하면서도 공존한다. 그리스 신화를 연상케 하면서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무대에 대해 그는 “대사가 전혀 없는 무대 예술을 하면서 전세계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했을 때 원형을 차용하게 된다. 그때 그리스 신화와 만나게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무대 위의 시인’이라는 별명에 대해서는 “무대 위의 제 의도를 정의한 것 같다”면서 “시인이라는 단어는 ‘하다’라는 어근에서 온 단어다. 시인은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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