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대(對)중국 제재에 뜻을 모은 데 이어 양국 간 첨단기술 협력을 강화하며 더욱 밀착하고 있다. 중국과의 기술 패권 전쟁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동맹국의 지지가 필요한 미국과 이런 상황을 활용해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노리는 일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반도체 생산에서 한국·대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망 재편을 꾀하는 가운데 일본이 두각을 드러낼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입지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요미우리신문은 26일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성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회담을 열고 반도체 및 첨단기술 협력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성명은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해 양국이 새로운 로드맵을 마련하고 인공지능(AI) 및 양자기술 등에 대한 협력을 구체화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요미우리는 “미 행정부가 설립할 예정인 국립반도체기술센터와 일본 정부가 지난해 설립한 반도체기술센터 간 연계를 비롯해 스타트업을 포함한 민간 차원의 협력도 추진될 것”이라고 전했다.
올해 들어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첨단기술 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의 밀착은 갈수록 공고화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일본에 대한 ‘통 큰’ 투자에 나서고 있는 점이 대표적이다. 앞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 글로벌 반도체 생산 업체 및 연구 기관과 회담에 나선 직후 마이크론은 일본 히로시마에 최대 5000억 엔(약 4조 7400억 원)을 투자해 차세대 반도체 생산 공장을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화답해 투자액의 40%에 달하는 2000억 엔을 보조금으로 지급하기로 했다.
인텔 역시 일본 문부과학성 산하 이화학연구소와 양자컴퓨터 기술 연구 및 반도체 공동 개발을 위한 각서를 체결했다. IBM은 지난해 양국 외교·상무장관 간 ‘2+2 경제 대화’를 계기로 일본 반도체 합작법인 라피더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2나노 반도체 공동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달 IBM은 구글과 함께 미일 첨단기술 교육·개발에 1조 500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미일 간 긴밀한 협력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첨단기술에 대한 집중 투자를 통해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려는 중국을 견제하는 데 있다. 이날 로이터통신은 미일 기술 협력 공동성명에 대해 “미국이 핵심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등을 마련해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등 중국 압박 수위를 키워왔다. 일본 역시 이에 동참해 7월부터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등 2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시행한다. 규제 대상에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한국·미국을 비롯한 42개 우호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수출에 경제산업성의 개별 허가가 필요하도록 해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제재라는 분석이다.
일본은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이 격화하는 상황을 활용해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꾀하려는 모습이다. 1980~1990년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던 일본은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이 무역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미일 반도체 협정 체결을 압박한 결과 경쟁력을 잃고 쇠퇴한 바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일본이 중국 견제와 함께 한국·대만 등 해외에 대한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려는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에 성공할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력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최근 미국이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에 따른 빈자리를 한국 기업이 메우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등 ‘아시아 중심의 반도체 생산 구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는 점 역시 한국 기업들에 부담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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