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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란 무엇인가[서우석의 문화 프리즘]





우리는 소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철학에서도 그렇다. 인도 철학만이 유일하게 소리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1600년 이후 유럽의 물리학은 소리의 원인이 물체의 진동이며, 진동은 공기를 통해 파동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소리의 감각적 질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요즈음 철학에서는 감각적 질을 “qualia”라는 말로 지칭하며, 감각적 질은 뇌 안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뇌 밖에는 공기의 흔들림이 있을 뿐이다. 박쥐가 반사파로 지각하는 “qualia”가 시각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요즈음의 생각이다.

우리는, 새 소리는 새의 내면에 “qualia”로서 존재하고, 바람소리는 바람의 속성 안에 “qualia”로서 존재하며, 음파는 단지 그것을 전달해주는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사물이 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물신론적 생각이었다.

그러나 스피커를 통해 교향곡을 듣는 경우를 생각하면, 판단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스피커로부터 바이올린의 멜로디와 첼로의 반주, 그리고 관악기의 집적거림도 듣는다. 이때 스피커의 콘은 하나의 단선적 변화로 진동한다.

우리는 이 하나의 진동에서 동시에 여러 소리를 듣는다. 달팽이관은 고막의 진동을 수백 개가 넘는 “sine wave”로 분해한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뇌는 이 단순파들을 받아들여 개개의 악기 소리로 다시 합성해야 할 것이다. 그 기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927년 코펜하겐의 “양자 이론”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은 덴마크 출신인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 “눈을 감으면 달이 없다는 뜻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보어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아인슈타인은 펄쩍 뛴다. 속으로 “이 친구 미쳤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귀를 막으면 새들의 노래가 없는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외부에 진동은 있지만, “qualia”가 없기 때문이다.

붓다의 생각을 보자. “감지되는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보이는 것의 원인인 연기(緣起)의 단서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팔리어의 “paticca-samuppada”가 “緣起”의 어원이다. “의존해서-생겨남”의 뜻이다. 중국은 이 부분을 “色卽是空”으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의 단순성 때문에 그 뜻에 대한 이론이 분분했었다. 멋 부린 표현은 항상 복잡한 해석을 낳기 마련인가 보다.

소리에 대한 흥미로운 그러나 잘못된 생각을 살펴보자. 그리스인들은 두 물체의 충돌로 소리가 발생하며, 높은 소리는 낮은 소리보다 그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뛰어가는 사람을 낮은 목소리로 부르면 다들 이상하다고 쳐다 본다.

중국의 樂記는 “凡音之起, 由人心生也. 人心之動, 物使之然也.”라고 소리를 정의한다. 요약하자면, “凡音之起는 由人心生이고, 人心之動은 物使之然이다.” 즉, “모든 소리의 일어남은 마음이 생긴 때문이고, 마음의 움직임(생김)은 사물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로 풀이된다.

결론은 “마음이 소리를 그렇게(然) 만들어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然”이다. 우리의 관심은 “그렇게”가 아니라 “어떻게”이다. “어떻게”를 괄호 안에 넣어 설명해 보자. “마음의 움직임은 그렇게(然: 아이콘을 떠 올리려, 발음이 일어나게 해서) 소리를 만든다”가 된다.

한자가 먼저고 소리는 나중이라는 뜻인데, 이를 “然”으로 감춘 것이다. 소리는 뒤로 밀려나고, 아이콘, 즉 표의문자가 중국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게 된다.

소리에 대한 오해의 절정은 쭈커칸들(Victor Zucherkandl)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Sound and Symbol”(1956, 번역 서인정, 1992. <소리와 상징>)에서 그는 “제 3의 공간”을 제시한다.



음악을 들을 때에 음들은 공간 안에서 움직인다. 음들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다시 내려오기도 한다. 음들이 움직이기 위해서 공간은 필수적일 것이다.

그는 시각적 공간과 정신적 공간에 이어 청각적 공간을 설정하고, 이 공간 역시 생활공간과 같은 실존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청각공간이 외부에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은 “qualia”가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위상수학을 생각해 본다. 위상수학은 공간을 정의한다. 공간은 하나의 집합이며, 한 집합(X)과, 그 집합과 똑 같은, 그러나 그 안에 공집합, 전체집합, 부분집합, 합집합, 교집합 등의 가족을 설정한 (T) 집합을 가정한다. 그리고 (X) 집합의 원소 하나하나와 (T) 집합의 가족 간의 연결을 결정해 준다. (X) 집합과 (T) 집합을 나눈 것은 설명을 위한 것일 뿐, 사실 둘은 하나의 집합이다. 모든 점과 모든 점이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 우리의 몸이 존재하는 삶의 공간이다. 점과 점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한편 지하철 공간의 집합에는 1, 2, 3 호선 등의 부분집합과, 그 부분집합 간에 교집합이 있다. 환승역들이 교집합이다. 다른 라인에 있는 두 역 사이에는 직접적 연결이 없고, 집적적인 거리도 없다. 환승을 거쳐야만 연결된다.

음악적 공간은 음의 집합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거리가 없는 공간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되는 마음 속의 공간이다. 몇 개의 음으로 시작해, 원소를 늘여 가며 커가는 공간이다.

집중해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소리의 원시적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 이 공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같은 음악이라도 다시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을 수 있다. 만들어가는 기쁨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한 철학자는 음악이 외부에 없다는 뜻에서 음악을 “Nicht-in- diesem-Welt-Gehörenheit”라고 정의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을 했던 철학자의 이름이 생각나지를 않는다. 검색을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소리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여기까지다.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약력]서울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음악대학교 학장

[저서]시와 리듬(1981, 개정판 2011), 음악을 본다(2009), 세계의 음악(2014) 등

[번역]기호학 이론(U. Ecco, 1984), 서양음악사(D. J. Grou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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