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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책의 방…강애란의 우주

'사유하는 책, 빛의 서재' 강애란展

종로구 수림큐브, 5월 31일까지

1980~90년대 희귀 초기작부터

미디어아트로 태어난 '라이팅 북'

강애란의 미디어 설치작업 '지식의 탑(The Towering of Intelligence)' /사진제공=유아트랩서울




“책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이며, 수없이 많은 관계의 축이다.”

현대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이 말처럼 책은 단순한 정보의 저장소를 넘어 인간 존재와 시간, 감정과 기술이 교차하는 ‘응축된 우주’다. 여기, 빛나는 책의 방이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철학서부터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집, 쿠사마 야요이나 백남준의 작품집이 반짝이는 책으로 다시 태어났고 탑처럼 쌓여 방을 이뤘다. 미디어 아티스트 강애란의 작품 ‘지식의 탑’(The Towering of Intelligence)이다. 2016년 아르코미술관 개인전 때 처음 선보인 작품이 이번 전시 ‘사유하는 책, 빛의 서재: 강애란 1985~2025’이 열리는 종로구 와룡동 수림큐브 공간에 맞춰 재제작 됐다. 수림큐브는 재일교포 사업가였던 동교 김희수(1924~2012)가 인재양성과 예술지원의 뜻을 이루고자 설립한 수림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전시공간이다.

이번 전시는 책을 축으로 지난 40년간 활동해 온 작가의 예술적 사유 궤적을 펼쳐 보인다. 강애란은 책에 대해 “사유의 도구이자 감정의 저장소였으며, 동시에 감각을 일깨우는 예술적 장치”라고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책은 영혼의 거울”이라고 했듯, 강 작가에게 책은 정지된 매체가 아니라 빛과 소리, 몸의 감각까지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강애란의 1998년작 '쿨 마인드' 시리즈. 생각 주머니로서 등장한 '보따리'가 훗날 책으로 발전했다. /사진제공=유아트랩서울


작가의 초기작은 ‘보따리’ 형태였다. ‘생각의 주머니’로서 보따리가 책으로 발전했다. 지하 1층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1980~90년대 초기작을 통해 책과 기억, 존재의 물질적 조형을 탐색한 여정의 시작을 보여준다. 석판화와 보따리 연작으로 시작된 초기 작업은 1층의 VR설치와 LED 인터페이스로 구현된 라이팅 북(Lighting Book)‘ 시리즈로 진화했다. 암막커튼이 드리운 맞은 편 전시장에서는 인터랙티브 라이팅 북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책꽂이에 놓인 여러 책 중 하나를 골라 선반 위에 올려놓는 순간, 전시장을 꽉 채우는 크기의 거울형 설치 작업이 책으로 변신한다. 읊조리는 목소리로 가득한 방에서, 빛나는 책 속으로 들어가 책 안을 거닐어 보는 경험까지 가능하다. 인간의 정신성을 밝히는 강애란의 ‘라이팅 북’ 연작은 ‘감응하는 책’이라는 존재론적 형식으로 확장됐다. 이 연작은 미디어아트 최고 권위의 미술관인 독일 ZKM 등지에 소장돼 있다.

강애란의 '라이팅북' 인터랙티브 미디어 설치 작업. 관람객이 선반 위에 올려 놓는 책의 종류에 따라 이미지와 글귀가 모두 달라지는 체험형 작품이다. /사진제공=유아트랩서울




강애란이 2014년부터 선보인 '디지털북 프로젝트-오리엔탈 버전' /사진제공=유아트랩서울


“책은 시간의 족쇄마저 끊어 버린다.” 칼 세이건이 그랬다.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된 옛 사람들의 책, 고서의 제본 방식, 한지의 질감과 세로쓰기까지 동양적 미감에 ‘라이팅 북’을 접목했다. 2층 전시장에서는 과거의 정서와 미래적 감각이 공존한다. 책가도 형식의 전시방식도 흥미롭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덕수궁 전시 등에 선보였던 작품이다.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성 계몽 잡지 ‘신여자’ 창간인 김일엽, 조선 최초의 여성 성악가 윤심덕,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최승희. 그리고 잔인한 식민 역사의 상징이자 기억되지 않으면 반복될 지도 모를 폭력의 증거인 위안부 문제까지. 강 작가는 20세기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존재이지만 잊혔던 인물들의 책을 다루고 있다. 주체적인 여성들의 존재와 목소리를 시각적으로 되살려냈다.

강애란의 '라이팅 북' 연작 중 독립적이고 기념비적인 여성 시리즈 중 일부. /사진제공=유아트랩서울


강애란과 함께 한 책은 더 이상 활자와 제본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빛이 되고, 공간이 되며, 감각과 사유의 매개가 된다. 다시 보르헤스다. 그는 “인간이 창안한 도구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책이다. 다른 도구들은 인간의 몸이 확장된 것이지만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라고 했다. 책을 둘러싼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펼쳐놓은 이번 전시는 5월31일까지 이어진다.

강애란 '하이퍼북-애드거 앨런 포의 시집 전집' /사진제공=유아트랩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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