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중문화가 외국에서도 인기가 높아지더니 문화 전반에 걸쳐 국제적으로 ‘K컬처’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외교관으로 해외 근무를 한 1980년대 미국에서는 한국 김치는 물론이고 일본 사시미(생선회)도 모르거나 먹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2023년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올해 뉴욕 최고의 요리 8선’ 중 하나로 한인 식당의 돼지곰탕을 꼽았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NYT가 3일 발표한 ‘2025년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 100곳’에 한식당이 8곳이나 포함됐다. K팝이 빌보드 차트의 상위권에 오르는 것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전 세계에서 영화·음악·미술·음식 등 한국 문화의 확산은 뚜렷한 현상이 되고 있다.
문화는 서로 다른 문화의 영향으로 변화하고 진화하기 때문에 경쟁력 있는 문화가 확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1990년대 K팝 음악이 처음 주목받았을 때 미국의 음악평론가가 “K팝은 힙합 음악을 재활용(recycle)한 것 같다”고 해서 우리나라 팬들의 공분을 산 적이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모든 문화는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K팝이 기존 음악 스타일을 한국적 또는 아시아적 감각과 융합해 경쟁력 있는 음악 장르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마치 과거 홍콩 영화가 미국 할리우드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나름대로 독특한 스타일로 발전시켜 세계 영화계를 풍미한 것과도 비교될 수 있다.
미국 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1993년 ‘문명의 충돌’이라는 저서에서 앞으로 국가 간 분쟁은 주로 서로 다른 문명권 간의 투쟁 형태를 띨 것이라고 주장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세계화 과정에서 다른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 서로 부딪치는 일이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념을 대체하는 주된 갈등 요인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 것 같다. 오늘의 세계를 보더라도 중동처럼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간의 충돌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같은 문명권 내 국가들 간의 갈등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같은 문명권의 중국보다 오히려 다른 문명권에 속한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문화적으로도 가까워진 것이 좋은 반론이 된다.
보다 넓게 보면 세계화 시대를 맞아 인류 전체의 문화적 동질성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지구의 어디에서든 인터넷으로, 유튜브로, 또는 직접 여행을 가서 다른 문화를 접할 기회가 폭발적으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들으면 이게 무슨 음악이냐고 할 록(rock) 음악이나 힙합을 전 세계 젊은 세대가 공통적으로 좋아한다. 각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를 어떻게 보존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지만 새로운 문화가 빠르게 퍼져나가 기존의 문화와 융합하는 현상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 서로 다른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해주면서도 경쟁력 있는 문화가 공유되고 또 서로 융합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가급적 많은 국가가 동질성이 높은 열린 사회가 되면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K팝이나 김치와 같은 우리 문화를 다른 나라에 전하고 함께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도 중남미 음악이나 아프리카 음식과 같이 남들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즐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문화가 반드시 충돌하는 게 아니고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헌팅턴 주장의 오류를 입증할 뿐 아니라 인류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으니까.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