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신중국 건국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열병식을 통해 ‘신냉전 시즌2’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시 주석은 3일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전승절) 80주년’ 기념 행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한자리에 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핵보유국인 북한과 러시아를 끌어안으며 ‘반(反)미국, 반서방 연대’를 과시하는 동시에 미국과 글로벌 패권을 놓고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리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일각에서 시 주석의 권력 이상설을 이유로 질서 있는 퇴진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지만 이날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며 장기 집권 플랜에도 시동을 걸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 주석은 이날 톈안먼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 연설에서 “혈육으로 만리장성을 쌓아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외세 침략에 맞서 완승을 거뒀다”며 항일 전쟁의 승리를 강조했다. 이는 집권 이후 시 주석이 항일 전쟁의 의미를 크게 부각해온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중화민족이 일본의 침략이라는 굴욕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과거 청나라가 세계를 제패하는 강대국의 반열에 있었으나 아편전쟁으로 몰락하고 반식민지 경험 등 굴욕의 역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의 승리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한 출발점이 됐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시 주석이 201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하며 제시한 국가적 비전이자 통치 이념인 ‘중국몽’에도 담겨 있다. 그는 “중화민족은 강권에 굴하지 않으며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이제 빛과 어둠, 진보와 반동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중국 인민은 함께 공동의 적에 맞서 싸웠다”고 강조했다. 또 “역사는 인류의 운명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경고한다”면서 “인류는 다시 평화와 전쟁, 대화와 대결, 윈-윈(Win-win) 협력과 제로섬 게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전승절 8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와 북한 정상들과 함께 긴밀한 유대를 과시한 것도 미국 등 서방에 맞선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날 시 주석은 20여 명의 정상급 외빈과 톈안먼 망루에 오르며 왼쪽에는 김 위원장, 오른쪽에는 푸틴 대통령과 나란히 서는 모습으로 반서방 연대의 결속을 과시했다.
외신들은 북중러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시 주석이 김 위원장, 푸틴 대통령 옆에 서서 ‘서방에 도전하는’ 열병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중국이 미국 이후 국제 질서의 관리자로 발돋움하려는 상황에서 중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담겼다는 분석이다. AFP통신은 “세계를 무대로 한 중국의 쿠데타”라고 표현했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글로벌 힘의 균형이 극적으로 재편되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역대급 규모로 치러진 이번 열병식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닌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질서에 대항해 새로운 국제 질서를 창출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자리였다는 평가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라이언 하스 중국센터장은 “시 주석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자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제 시스템을 개편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며 “그는 다른 정상들이 열병식에 참석한 것을 이런 목표를 향한 의미 있는 진전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지난달 31일 톈진에서 개막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부터 전승절 80주년 기념식까지 이어지는 빅 이벤트를 통해 명실상부한 ‘반서방’ 진영의 맹주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로이터는 “푸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시 주석과 회동하는 것은 서방 주도 질서를 재정의하려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시 주석의 영향력을 입증한다”며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 제재, 관세 주도 외교는 오랜 미국 동맹에 긴장을 초래한다”고 평가했다.
얼마 전까지 건강 이상설, 군부 내 권력 다툼 등으로 시 주석의 권력이 약화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부 나왔지만 이번 열병식을 통해 대내외로 ‘1인 통치 체제’의 굳건함이 입증됐다는 분석에도 힘이 실린다.
한편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2015년 70주년 열병식 당시에는 국공(국민당과 공산당) 합작을 부각하며 ‘중국과 대만이 일제 침략에 맞서 함께 싸웠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이번에는 중국공산당이 항일 전쟁 승리를 주도했다며 달라진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장제스가 이끌었던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현 대만)의 역할을 애써 축소하자 대만은 중국이 대만을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렸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열병식에 중국이 선보인 첨단 무기는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설’을 압박하는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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