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대항해시대’를 개척했던 포르투갈과 중국의 첫 만남은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로 가득했다. 포르투갈인들의 중국 방문에 대한 명나라 실록의 첫 기록은 1517년 6월 15일 등장하는데 당시 사절단을 이끌던 선장 페르낭 피레스 데 안드라데는 광저우에 진입하는 주장강에 닻을 내리자마자 휘하의 포병들에게 예포를 발사하도록 했다. 이는 외국 항구에 도착한 유럽 함대가 일반적으로 행하던 환영과 존경의 표시였을 것이다. 꽝!
그러나 명의 관리와 군인들은 예포 소리를 듣고 경악했다. 중국에서 환영과 존경의 의미로 대포를 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적대 행위 혹은 최소한 위협의 신호였다. 다행히 안드라데가 사과함으로써 상황이 잘 수습됐으나 이 첫 만남의 해프닝은 이후 진행될 양국 사이의 오해와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명나라가 바다 건너에서 오는 선박을 받아들이는 분류는 조공 아니면 밀수 단 두 가지였다. 가령 당시 류큐와 일본에서 오는 선박은 조공선으로 인정되기에 입국이 가능했다. 하지만 조공국 명단에 없던 포르투갈의 선박은 어떤 명분으로 입국시킬 수 있는가. 포르투갈이 중국에 접근한 목적은 명백히 무역이었으므로 그들은 조공을 가장해 입국하려 했다. 마침 당시 명의 황제였던 정덕제는 기존의 황제들과 달리 ‘일탈’을 일삼았기에 1520년 포르투갈 사절단을 난징에서 접견하고 베이징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책봉·조공의 관계를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던 포르투갈 사절단은 내지에서 쫓겨났고 결국 뇌물을 사용해 1557년 중국의 최남단 마카오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에도 유럽의 해상 세력과 중국은 상당 기간 서로에 대한 오해와 무지로 충돌을 겪었고 19세기 아편전쟁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이 개척했던 마카오는 오랜 시간 동서 문화의 교류와 융합이 이뤄진 도시로 성장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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