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열린송현] 노란봉투법과 산업 안전의 딜레마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

원청, '노봉법' 따르면 하청 사용자 돼

리스크 의식, 현장 안전조치 소극대응

불법 내몰리고 산업재해 예방 멀어져

사진 설명




몽테스키외는 저서 ‘법의 정신’에서 “사람들이 형벌을 받고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폭정의 결과이고 잘못된 법에 대한 반응”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에게 법을 잘 지키도록 하려면 엄벌보다 법 위반에 대해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산업 현장에서는 산업안전보건법·중대재해처벌법과 같은 산업안전법 위반으로 처벌돼도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준법 의지가 강해도 지킬 수 없는 규정이 많은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일명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때문에 법을 위반해도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는 현상이 심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산업안전법에 따르면 원청(도급인)은 하청(수급인)의 작업 방법을 결정하고 작업을 지휘하는 등 하청의 근로 조건인 산업 안전에 직접 관여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원청은 노란봉투법상 하청의 근로 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하는 사용자로 인정돼 의도와 관계없이 하청 근로자의 사용자가 되고 만다는 점이다. 원청이 산업안전법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만 있을 뿐 하청 근로 조건을 지배·결정할 의사도 없고 그럴 입장에 있지 않더라도 사용자 지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원청은 하청 근로자에 대해 적극적인 안전 조치를 하지 않으면 산업안전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되고 산업안전법에 따라 안전 조치를 하자니 노란봉투법상 사용자가 될 수밖에 없다. 원청은 어느 하나의 법은 지킬 수 없는 불법에 내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어느 기업이 산업안전법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한다고 가정하자. 원청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설비 보수 업체인 하청의 작업 방법과 근로자 배치를 결정한다. 원청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화물 취급 작업을 하는 하청에 대해 작업을 지휘한다. 원청은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하청의 관리 감독자에 대해 업무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른 조치를 한다. 이 경우 그 기업은 노란봉투법상 사용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심각한 것은 하청 안전 관리에 충실할수록 그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형사법은 헌법 원리인 명확성 원칙이 강하게 요구된다. 산업안전법의 경우 원청과 하청의 의무가 이것저것 뒤섞여 있어 원청의 의무 범위가 매우 모호한 상황이다. 노란봉투법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라는 표현 또한 형사법의 행위 규범으로는 부적합해 명확성 원칙 위반 소지가 크다. 하청 근로자에 대한 안전 조치 방법을 놓고 극심한 혼란이 초래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모순되는, 게다가 위헌 소지가 큰 법들로 기업을 포위해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건 국제 기준에 저촉될 뿐만 아니라 법치주의에도,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정부가 이를 모른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고도 방치한다면 무책임한 처사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청은 이런 혼란 속에서 하청 근로자의 사용자로 인정될 수 있는 리스크를 의식해 하청 근로자 안전에 가능한 한 방어적으로 대응하려 할 것이다. 그만큼 재해 예방도 멀어진다. 엉성한 법들 때문에 근로자 안전이 희생되는 셈이다. 법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선 국민이 법을 위반해도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법 규범력이 추락한 사회야말로 몽테스키외가 그토록 경계했던 타락 사회임을 곱씹어 볼 일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