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성이 전날 밤 의사로부터 처방 받은 수면제 졸피뎀을 복용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평소보다 깊이 잠든 덕에 피로가 풀린 듯했지만 다음 날 출근길 그녀의 눈꺼풀은 자꾸만 무거워졌고 결국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이런 불상사는 결코 이 한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다. 조사 결과 같은 양의 졸피뎀을 복용하더라도 여성은 남성보다 다음 날 아침 혈중 약물 농도가 약 40% 더 높게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체지방 비율과 간 대사 효소 활성 등 생리학적 차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약효가 오래 남아 각성 능력이 떨어지니 운전이나 기계 조작 시 사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이 확인되자 2013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여성의 졸피뎀 권장 복용량을 기존의 절반으로 낮추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단순한 ‘용량 조정’이 아니라 의약품 개발과 허가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효과와 안전성 차이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경종이었다. 이후 미국 FDA는 임상 시험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동안 의학 연구는 ‘평균적인 인간’을 가정해왔다. 그러나 그 ‘평균’은 많은 경우 남성의 신체와 생리적 특성을 전형으로 삼은 것이었고 연구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차이는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여성 환자들은 적절한 약물 용량을 못 받거나 부작용 위험에 노출되기 쉬웠다. 반대로 자가면역성 류머티즘 질환처럼 여성에게 더 흔한 병은 진단 기준과 연구가 여성 환자를 중심으로 진행돼 남성 환자의 특성과 증상은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라도 성별에 따른 차이를 정밀하게 반영하는 의학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성차(性差) 의학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다. 남녀는 호르몬 분비 패턴, 체성분 구성, 유전자 발현, 면역 반응 등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부 지용성 약물은 여성의 체지방에 더 오래 축적돼 약물 농도가 높게 유지되며 심혈관 질환의 경우 여성은 흉통보다 소화불량·피로감·호흡곤란 같은 비전형 증상을 더 자주 호소한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면 진단이 늦어지고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다. 둘째, 사회·문화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직업별 위험 노출, 가사·돌봄 역할, 건강 행태와 생활 습관 등이 성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같은 우울증이라도 남성은 공격성·음주 증가로, 여성은 불안이나 체중 변화로 증상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성차 의학은 단순히 남녀 차이를 비교하거나 여성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치료와 예방책을 마련하는 과학적 접근이다. 성별 특성을 반영하면 불필요한 부작용을 줄이고 치료 성공률을 높이며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는 개인 건강뿐 아니라 사회 전체 복지 향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도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5년 전 개정된 과학기술기본법은 국가 과학기술 정책과 통계·지표 분석 과정에 ‘젠더 혁신’을 반영하도록 했다. 젠더 혁신이란 기초 연구부터 사업화까지 전 과정에서 생물학적 성(sex)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성(gender)을 분석해 편견과 편향을 줄이고 과학기술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높이는 노력을 뜻한다. 의료에서 이를 구현한 접근이 바로 성차 의학이다.
올해부터 국립보건연구원이 소화기·심혈관계 질환을 중심으로 성차 의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아직 이러한 접근 방식이 임상 시험 설계와 보고, 그리고 의료 현장에 충분히 스며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국 FDA가 성별에 따른 데이터 분석을 의무화해 안전성·유효성 평가의 필수 요소로 삼듯 우리도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제도화를 서둘러야 한다. 성차 의학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음 세대 모두를 위한 과학이다. 이제 우리는 ‘평등 너머의 접근’을 통해 차이를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새로운 의료와 정책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두를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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