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지역은행들의 부실 대출 문제가 연이어 터지면서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공포가 미국 월가를 휘감고 있다. 과잉 신용을 바탕으로 대출을 받고 쓰러지는 비우량 업체들이 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도 부담을 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16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미국 서부·남서부 11개 주에 거점을 둔 지역은행 자이언스뱅코프는 이날 완전 자회사인 캘리포니아뱅크앤드트러스트가 취급한 상업·산업 대출 가운데 5000만 달러를 회계상 손실로 처리했다고 밝혔다. 네바다·애리조나·캘리포니아주 등 미국 남서부의 또 다른 지역은행인 웨스턴얼라이언스뱅코프(WAB)도 사모투자 회사인 캔터그룹에 대한 선순위 담보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웨스턴얼라이언스뱅코프의 채권 순위가 다른 채권자보다 후순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탓이다. 웨스턴얼라이언스뱅코프는 캔터그룹에 대해 사기 혐의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날 두 지역은행의 부실 대출 소식은 곧바로 글로벌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자이언스뱅코프와 웨스턴얼라이언스뱅코프가 각각 13.14%, 10.81% 급락한 것을 비롯해 TSMC의 3분기 호실적에 힘입어 장 초반 강세로 출발했던 뉴욕증시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시장 불안에 안전자산을 찾는 흐름이 확연했다. 이날 5년물 미 국채금리는 전장 대비 3bp(bp=0.01%포인트) 내린 3.51%를 기록했다. 이는 2024년 10월 초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 만기 미 국채금리도 2.7bp 낮은 3.40%를 나타냈다. 이는 2022년 8월 이후 최저 수준이다. 10년 만기 미 국채금리도 3.95%로 2.8bp 하락해 올 3월 말 이후 처음으로 4% 아래로 떨어졌다. 금값은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가며 사상 처음으로 4300달러를 돌파했다.
최근 미국 금융가는 부실 대출 문제로 경고음이 켜진 상태다. 미국 최대 투자은행(IB)인 JP모건과 지역은행인 피프스서드뱅코프는 지난달 초 자동차 대출 업체 트라이컬러의 파산으로 각각 1억 7000만 달러, 1억 7000만~2억 달러 규모의 손실을 냈다고 알렸다. 트라이컬러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본사를 두고 65개 대리점을 운영하던 회사로 주로 신용 이력이나 사회보장번호(SSN)가 없는 고객에게 자동차 금융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오일필터와 와이퍼 등을 제조하는 자동차 부품 대기업 퍼스트브랜즈에 투자했던 투자은행 제프리스도 이날 덩달아 투매 대상이 돼 주가가 10.62% 급락했다. 퍼스트브랜즈는 지난달 말 60억 달러 이상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보호를 신청한 회사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최고경영자(CEO)는 이달 14일 3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트라이컬러의 파산 사태를 거론하며 “바퀴벌레가 한 마리 나타났다면 아마도 더 많을 것이고 모두가 이에 대해 미리 경고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이먼 CEO는 같은 날 CNBC에서도 “우리는 14년간 신용 강세장을 겪었다”며 “트라이컬러의 파산은 신용 시장에 일부 과잉을 나타내는 초기 징후”라고 지적했다. 월가 일각에서는 2023년 3월 SVB 파산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 내 16위 규모였던 SVB는 급격한 금리 인상과 벤처 기업 중심의 취약한 대출 구조를 이기지 못하고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이 시작된 지 단 하루 만에 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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