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들은 각각 고유한 번호를 가진다. 정규(1923~1971) 작품 ‘교회’의 소장품 번호는 137번. 1969년 설립된 국립현대미술관이 1972년 매우 이른 시기에, 소장품 구입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수집한 작품이다. 138번 ‘작품’의 작가도 정규이다. 기록상 이 두 작품의 이전 소장가는 화가 이항성(1919~1997)이었다. 정규 작가가 1971년 타계한 후 1972년 미술관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작가 미망인 이운자 여사를 비롯한 이경성, 이마동, 이항성, 최순우 등이 작품을 출품했고, 이를 계기로 이항성 소장의 정규 작품 2점을 미술관이 수집하게 된 것이다.
이항성과 정규는 화업의 동반자이자 우정 어린 친구였다. 1958년 현대작가전, 1960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1961년 한국미술사연합회, 1962년 한국판화전, 1963년 정규·이항성 판화전, 1964년 판화가협회, 1965년 제 8회 현대작가초대전, 1969년 목판화 4인전 등 꾸준히 같이 활동했다. 이항성은 정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회화와 판화를 국내외 여러 전시에 적극적으로 출품해 작가를 알리고자 했다. 두 사람의 화풍은 달랐으나 이항성이 정규의 작품을 매우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장품은 두 작가의 남다른 우정에 대한 징표다.
작품 ‘교회’는 가로수, 장독대, 교회, 집 등이 가장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로 단순하게 표현돼 있다. 색면분할의 배경과 기하학적 양식의 사물들이 어우러져 마치 입체의 펼친그림을 보는 듯 하다. 공간을 과감하게 단순화하는 조형 방식은 정규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평면화된 선과 면은 작가가 구체적인 입체에 대한 의식을 가졌음을 방증한다. 입체파적 영향이라 볼 수 있다. 각각의 색면은 채도가 높은 색으로 구분돼 있지만, 그 아래에는 서로 다른 색을 칠하고 색면마다 또다른 색을 덧칠해 미묘한 색의 울림을 만들었다. 작품을 실제로 보면 표면에 물감의 빙렬(가느다란 표면의 금)이 있어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1950년대 중반 작가가 여러 차례 십자가를 언급한 적 있어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더라도 그가 十자 형태에 관심가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정규는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여러 글에서 “현실의 체험을 어떻게 시각에 의해 개성화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언급했다. 그림을 ‘시각이 구성한 환상’으로서 규정하고 이를 작품 속에서 어떻게 표현할 지도 중요하게 다뤘다. 정규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하는 양식을 추구했는데, 색감와 조형의 근원은 우리의 토속적 이미지였다. 그렇다고 단순히 전통을 그리는 것은 아니었다. 전통 도자기나 민화 등에서 발견한 조형적 원리를 현대미술의 추상 형식과 결합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외래 사조에 의존하거나 혹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이나 과거의 관습에 얽매인 미술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간에서 직접 체험하는 ‘현실적인 미술’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5년 ‘현대예술’ 창간호에서 정규는 추상미술을 단순히 형태가 없는 그림으로 보지 않고 현대인이 직면한 실존적 상황과 지적인 조형의지의 결과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자신의 이론을 절제된 조형미와 추상적인 구성으로 시각화한 대표작이다. 무엇보다도 1955년은 절친이던 이중섭의 개인전이 열린 해이자, 작가 자신이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시기로 그해 12월 14일부터는 서구 현대미술가 14명에 관한 연재 글을 ‘현대의 신예화가’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기고하기도 했다. 피니옹, 자코메티, 달리, 샤갈, 클레, 브라크, 레제 등을 통해 다양한 현대미술의 이론을 대중에게 소개함과 동시에 자신의 화풍에도 접목시킬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은 휴전 이후 사회 재편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많은 예술가들은 여전히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예술을 향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자신만의 작품활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특히 환도 이후 1954년부터는 많은 이들이 다시 서울로 이사하면서 작가들 간의 교류가 잦아졌고, 국전 이외에도 많은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해 작가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교회’라는 작품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이겨내고 삶의 희망을 품고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은 소망이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외에도 ‘교회’라는 제목의 1950년대 작품이 1점 더 알려져 있어 작가가 지닌 전후 휴머니즘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규는 차가운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작품 속에 유머 감각을 발휘했는데 그의 유머러스한 개성은 작가의 싸인에서 정점을 찍는다. 작가는 교회의 지붕 바로 아래 창문이 있을법한 위치에 자신의 이름 규를 한자(圭)로 적어 서명했다. 통상 유화에서 작가의 서명이 화면 아랫부분이나 가장자리 혹은 뒷면에 씌여진다는 걸 감안한다면 자신의 싸인을 조형의 일부로 활용한 정규의 선택은 기발했다. 또다른 ‘교회’작품에서는 마치 교회 앞 나홀로 서있는 나무처럼 싸인을 했는데, 이 시기의 독특한 서명방법은 다른 작품에서도 가끔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자유분방한 사고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1955년 임응식이 촬영한 인물사진이다. 입술을 아래로 찌그러뜨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붓을 들고 있는 모습은 다른 예술가들의 진중하고 근엄한 초상 사진과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가 맨 넥타이의 기하학적 패턴은 ‘교회’ 작품의 색면분할과 묘한 공통점이 있어 당시 작가의 시각적 지향점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당시 사선의 줄무늬 넥타이가 유행했다고 하더라도 다른 남성들의 넥타이 패턴보다는 면이 더 넓어 보여서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데 정규의 다른 사진에서도 이 넥타이가 발견된다는 점에 있어서 작가가 얼마나 애호하던 아이템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정규의 파격적 면모는 주로 국전을 제외한 여러 단체와 협회에서 활동한 이력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1958년부터 제3회 모던아트협회에 참여했는데 모던아트협회는 전위적인 정신을 지니고서 추상이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삶과 정신, 현실과 사유를 통합하는 태도를 보여주면서 작가들의 실험을 존중하는 열린 연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정규는 유화, 한국화 같은 장르적인 구분없이 유화부터 판화, 도자작품까지 거리낌없이 출품했다.
하지만 1971년 48세 비교적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왕성한 활동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잔존하는 작품이 많지 않은 가운데 필자의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그의 또다른 작품들은 2000년대까지 운영되던 평창동 어느 식당 사장님의 개인소장 도자기와 회화작품들이다. 소장품을 한꺼번에 일괄 판매하기 위해 미술 관계자들 사이에 사진으로 돌았던 그 작품들은 이후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고, 그 소장가 또한 전혀 알 길이 없다. 언젠가 작품들이 세상에 다시 나와 정규의 팔방미인 같은 진면모가 제대로 밝혀질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정규 ‘교회’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3월 8일까지 열리는 ‘조우:모던아트협회’전에 출품됐다.
★정규(1923~1971) : 1923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나 1941년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1943년 태평양 전쟁 중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 뒤 금강산 등지에서 칩거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1946년 금강산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을 원산에서 보내면서 이중섭과 가깝게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육군보병학교 정훈실 문관이 되어 부산에 머물면서 국방부 종군화가로 활동했다. 1952년 첫 개인전을 개최했고 1953년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소품전을 열었다. 종전 후 서울로 올라와서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 출강했으며 1954년 김환기, 이경성, 최순우 등과 함꼐 국립박물관 개최 한국현대회화 특별전을 주도하고 작품을 출품했다. 국립박물관에서 주최하는 현대미술강좌에 강사로도 참여했다.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에서 ‘심청전에서’로 수상했고, ‘백우회 발족기념전’에 참가했다. 같은해 국전에서 ‘푸른 목마’로 입선했다.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이화여대 미술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1956년에는 한국판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1957년에는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전임강사, 한국조형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을 역임하면서 모던아트협회 동인으로 참여했다. 1958년 국립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졍규 목판화개인전’을 열고 같은해 ‘제 1회 한국판화협회전’에 출품했다. 이어 미국 록펠러 재단 초청으로 미국 로체스터 공예학교에서 1년간 그래픽과 도자를 수학한 뒤 귀국했다. 미국에 있으며 1959년 미국 핑거레이크 미전에 모자이크 작품을 출품했고 제 3회 미국공예가회에 참석했다. 1960년에는 한국민속도자공예연구소를 창설하고 1962년에는 무역진흥공사 전문위원을 역임했다. 1963년 개인목판화집을 출간했고 제1회 수출상품 디자인전에 출품했다. 부산 해운대 호텔 도자벽화가 그의 작품이며, 경희대학교 요업과를 신설해 교수로 취임했다. 도자 부분에서의 활약으로 성북동 간송 전형필 선생 댁에 가마를 만들어 제작했고, 명동에 판매점을 만들어 도자의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진해요업 센터 설립에도 기술적인 조언을 한 바 있다. 1964년 공보부 주최 5월 신인전 심사위원을, 명동 오양빌딩과 자유센터에 도자벽화를 제작하며 회화·판화·도예 나아가 미술비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업세계를 선보였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1967년 ‘구상전’ 창립에 참여하며 한국 화단에서의 입지를 이어갔다. 1971년 지병으로 타계했다. 이후 도나장화랑, 현대판화미술관, 원화랑,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유작전이 열렸다. 여러 편의 미술비평 글 외에 저서 ‘고등미술’, 논문으로는 현대미술논(초), 한국현대도자공예운동서설 등을 남겼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자료과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여러 미술관과 기관의 운영자문위원, 소장품 수집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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