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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의 음악으로 듣는 여행] 붉은 벽돌로 지은 고궁...애증의 공간으로 거듭나다

영화 '더 페이버릿' 촬영지 '핫필드 하우스'

英 엘리자베스 1세 추억 깃든 저택

1611년 건물 4개중 3개 헐고 지어

제일 먼저 방문객들 맞는 '마블 홀'

여왕 상징성 드러내는 초상화 눈길

헨리 퍼셀 작곡한 '음악은 잠시동안'

느리게 연주되는 슈베르트의 소나타

주인공 감내해야 할 무거운 짐 암시

핫필드 하우스. /사진제공=진회숙




핫필드 하우스. /사진제공=진회숙


잉글랜드 남동부 하트퍼드셔에 있는 핫필드 하우스(Hatfield House) 는 영화 <더 페이버릿(The Favorate)>의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다. <더 페이버릿>은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과, 여왕의 측근인 두 여자 사이의 애증과 갈등을 그린 영화다. 앤 여왕의 오랜 친구이자 말벗인 말버러 공작부인은 여왕과의 친분을 무기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하지만 몰락한 귀족가문 출신의 애비게일이 궁으로 들어와 여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두 여자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애비게일은 공작부인이 정치적인 일로 여왕과 갈등하는 사이에 여왕의 마음 속 빈자리를 파고든다. 그리고 공작부인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공작부인을 죽이려는 애비게일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공작부인은 끝내 여왕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핫필드 하우스. /사진제공=진회숙 씨


<더 페이버릿>에는 앤 여왕이 나오지만 영화의 대부분이 촬영된 핫필드 하우스는 사실 앤 여왕과는 별 관련이 없다. 영국 왕가와의 인연을 따지자면 앤 여왕보다는 엘리자베스 1세 쪽에 훨씬 가깝다. 핫필드 하우스 옆에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궁전(Old Palace)이 있는데, 지금은 건물 일부만 남아있는 이 고색창연한 궁전은 엘리자베스 1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제임스 1세는 1607년 수상인 로버트 세실이 살던 테오발드 궁과 핫필드 궁전을 맞바꿨다. 핫필드 궁전의 새 주인이 된 로버트 세실은 1611년 옛 궁전을 구성하던 네 개의 날개 중에 세 개를 부수어 그 벽돌로 핫필드 하우스를 지었다. 오래된 핫필드 궁전을 구성하고 있던 조각의 일부가 핫필드 하우스로 옮겨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어린 시절, 그 행복했던 추억의 조각들은 이렇게 창조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되었다.

핫필드 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는 것은 마블 홀(Marble Hall)이다. 영화 <더 페이버릿>에서 여왕과 궁정 대신들이 함께 하는 연회가 벌어졌던 곳이다. 마블 홀은 핫필드 하우스가 처음 지어졌을 때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핫필드 하우스의 주인 역시 여기서 손님을 위한 연회나 무도회를 열었다. 바닥에 깔린 격자무늬 대리석 때문에 마블 홀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이 홀을 구성하는 주재료는 목재다. 층고가 상당히 높은 천장과 벽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조각된 목재로 마감되어 있다. 천장의 목재 장식 중앙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1878년에 그려 넣은 것이다. 벽에는 나폴레옹의 상징인 꿀벌과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다.

핫필드 하우스. /사진제공=진회숙


마블 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입구 쪽에 걸려 있는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다. 일명 ‘레인보우 초상화’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 1세를 그린 초상화 중에서 여왕의 권위와 영국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장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1602년, 엘리자베스 1세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어린 핫필드를 방문했다. 이때 여왕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핫필드 하우스의 주인인 로버트세실이 이 초상화를 제작했다. 당시 여왕의 나이는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초상화의 얼굴은 실제 나이보다 상당히 젊어 보인다. 황금시대를 구가한 왕국의 통치자로서의 상징성이 이렇게 ‘영원히 늙지 않는 여왕의 초상화’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여왕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 망토에 지혜를 상징하는 눈과 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여성의 옷은 대개 꽃이나 나뭇잎, 나비 같은 문양으로 장식하는 것이 보통인데 여왕의 옷에는 일반적인 자수에서는 잘 쓰지 않는 눈과 귀 모양의 수가 놓여 있다. 주안점이 장식성이 아닌 상징성에 있었던 것이다. 여왕의 오른 손에는 무지개가 들려 있고, 그 위에 ‘non sine sole iris(태양이 없으면 무지개도 없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나오는 방이 제임스 1세의 거실(James 1st Drawing Room)이다. <더 페이버릿>의 주인공인 공작부인과 애비게일의 등신대 인형이 영화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은 옷을 입고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이 방은 원래 로버트 세실 경이 리셉션 홀로 쓰던 방이다. 그런데도 제임스 1세 응접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벽난로 위에 있는 제임스 1세의 조각상 때문이다. 이 조각상은 얼핏 보면 청동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석상으로 돌 위에 색을 칠해 청동처럼 보이게 한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이 방은 앤 여왕의 침실로 쓰였다.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침실은 앤 여왕의 나약함과 외로움, 고통이 남몰래 발현되는 은밀한 공간이다. 앤 여왕은 17명의 아이를 임신하거나 출산했지만 모두 유산, 사산되거나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그녀는 이 방에서 17마리의 토끼를 키운다. 그리고 이런 여왕의 상실감을 간파한 애비게일은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토끼들을 각별하게 대하는 척 한다.

핫필드 하우스. /사진제공=진회숙


영화에서는 이 방이 매우 내밀한 공간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상당히 개방적인 공간이다. 일단 영화에 나오는 침대가 없고, 온통 태피스트리로 덮여 있는 벽에는 크고 작은 온갖 종류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림이 얼마나 많은지 거의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만약 나에게 이 방의 이름을 붙이라고 한다면 ‘초상화의 방’이라고 붙이고 싶다. 그만큼 초상화가 많다. 벽면을 가득 채운 초상화들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다. 이른바 ‘족제비 초상화’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마블 홀에 있는 레인보우 초상화보다 훨씬 앞선 1585년에 그려졌다. 여기서 여왕은 화려하게 장식한 검은 벨벳 드레스를 입고, 오른 손에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다. 왼쪽에 작은 흰색 동물이 있는데 이 동물은 족제비다. 하지만 그냥 족제비가 아니다, 금관을 두른 높은 신분의 귀족 족제비다. 족제비는 순결과 처녀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서재(Library)로 들어가니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고색창연한 고서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 공작부인의 침실로 사용된 서재는 여왕의 침실만큼이나 은밀한 공간이다. 애비게일은 2층 난간에서 몰래 책을 읽다가 여왕과 공작부인이 벌이는 은밀한 행위를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낯 뜨거운 일이 벌어지는 은밀한 공간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이곳은 은밀함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서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16세기 서적에서부터 최근에 발간된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1만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핫필드 하우스 같은 대저택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용도라도 계절에 따라 다른 방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다이닝 룸이 그런 경우이다. 세실 가문 사람들은 앞에서 소개한 제임스 1세 거실을 식당 겸 리셉션 룸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이보다 규모가 작은 식당을 이용했는데, 그것이 바로 겨울 식당(Winter Dining Room)이다. 겨울 식당 중앙에 있는 벽난로에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풍요의 여신이 있고, 벽에는 사계절에 걸친 17세기 이 지방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대형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다. 태피스트리는 1611년에 제작된 것으로 1846년 빅토리아 여왕의 방문을 목전에 두고 사들인 것이라고 하다.



<더 페이버릿>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바로 이 방에서 촬영됐다. 공작부인을 몰아낸 애비게일이 노래를 듣는 장면이다. 소프라노 가수가 합시코드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는 영국 작곡가 헨리 퍼셀의 <음악은 잠시동안(Music for a while)>. 동시대의 극작가 드라이든의 연극 <오이디푸스>의 공연을 위해 작곡한 극음악이다. 헨리 퍼셀이나 드라이든은 모두 앤 여왕과 동시대 사람이다. 애비게일처럼 앤 여왕도 퍼셀의 이 노래를 들었을까.

잉글랜드 남동부 하트퍼트셔에 위치한 핫필드 하우스. /사진제공=진회숙


음악을, 이 음악을 들어 봐요.

그대의 근심이 모두 사라지도록.

모두, 모두

그대 어떻게 그 많은 고통을 견뎠나요?

생의 즐거움을 외면한 채

삶의 영원한 굴레에 갇혔던 뱀이

마침내 추락하네. 추락하네. 추락하네.

귀족의 딸로 태어났으나 한 순간 몰락하여 시궁창에 빠져 살았던 애비게일. 그러나 이제 적수를 몰아내고 예전의 신분을 되찾았다. 이런 그녀의 아픔을 위무하듯 퍼셀의 가수가 노래한다.

“그대 어떻게 그 많은 고통을 견뎠나요?”

노래를 듣는 애비게일의 표정이 아련하다. 하지만 그녀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노래의 끝 무렵 “추락하네”라는 의미의 “drop“이라는 가사가 여러 차례 반복되는 바로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공작부인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공작부인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애비게일은 과연 행복할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분히 암시적이다.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왕이 애비게일에게 다리를 문지르라고 한다. 애비게일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여왕의 다리를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그때 흐르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음악은 영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아주 느리고 힘겹게 흘러간다. 애비게일이 감내해야 할 영원한 굴종의 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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