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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금융회사 지배구조] <3> 시스템을 짓누르는 '정치금융'

인사철마다 '보이지 않는 손' 작동… 줄타기·패배주의 굳어져

CEO 오르면 비전보다 연임시나리오 짜기 골몰

주인의식 사라지고 사업 경쟁력 강화도 헛구호

은행 수익만 바라보는 '외줄타기 경영' 악순환

지난 3월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경제혁신3개년계획 실천 방안 및 금융 규제 개혁 방안''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한 금융지주사 회장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메모를 하고 있다. 금융지주 회장들은 금융 당국으로부터의 인사 요청은 줄었지만 정치권의 청탁은 여전히 물리치기 힘들다. /=연합뉴스


지난 2010년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국민은행장을 뽑을 당시 금융계에서는 4~5명의 국민은행 부행장 출신 인사들의 이름이 하마평에 올랐다. 최초에는 내부 신망이 두텁고 영업력을 인정받은 A씨와 B씨가 경합하고 있는 것이 확실시됐다. 하지만 막판에 이명박 정부 실세인 K씨가 개입하면서 인사 구도는 완전히 틀어졌다. 당시 선임된 민병덕 전 행장이 통합 국민은행장 4명(김정태·강정원·민병덕·이건호) 가운데 유일한 내부 출신으로 기록되지만 낙하산 논란을 비켜가지 못하는 이유다. 임영록 당시 사장 역시 어 전 회장이 처음 사장으로 점찍었던 인물이 아니었다.

지난해 이건호 전 행장 선임 때는 정치권의 개입이 더 노골적이었다. 당시 리스크관리 본부장이었던 이 전 행장의 선임은 '깜짝 발탁'으로 비쳐졌지만 경쟁 관계에 있던 모 인사는 "지난해는 처음부터 이 전 행장으로 정해진 상태에서 다른 후보들이 하마평 들러리만 섰을 뿐"이라고 말했다. 임영록 전 KB지주 회장도 당시 회장으로서 제대로 인사권을 발휘하지 못한 셈이다. 처음부터 어긋났던 관계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 악화돼 결국 KB 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제도와 운용의 문제를 백번 말한다 해도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하는 이상 금융지주회사의 경쟁력 강화는 불가능하다. 관행처럼 반복된 인사개입은 조직 내부의 줄타기 문화와 패배주의를 고착화한다. 인사 시스템을 이른바 '정치금융'이 짓누르고 있는 셈이다.

최고경영자(CEO)가 성과 중심으로 뽑히고 이를 통해 평가받는 문화가 아니다 보니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기업 문화도 정착되지 않는다. 은행을 쥐고 있는 이상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도 조직을 게으르게 만든다. 국내 금융지주가 아직도 '어머니' 은행과 '자녀' 계열사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은행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금융지주=금융 겸업화를 통한 시너지 창출이라는 명분을 갖고 태어난 국내 금융지주는 엄밀히 얘기해 은행 중심의 모자형 금융그룹에 지나지 않는다. 2010년 이후 금융지주들이 사업 다각화를 위해 카드사를 분사하고 저축은행을 인수했으나 여전히 수익의 대부분은 은행에 의존한다. KB의 경우 당기순익에서 은행에 대한 의존도가 90%가 넘는다. 반면 HSBC그룹(영국), 도이치뱅크(일본), ING그룹(네덜란드)은 은행업과 투자은행업 또는 보험업이 균형을 이루며 성장하고 있다.

금융지주의 한 고위 관계자는 "금융지주에 대한 이해력과 뚜렷한 장기 비전이 없는 CEO는 결국 그룹의 모태인 은행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다"며 "이 과정에서 회장·행장 간의 마찰이 반복되고 금융지주 경쟁력 전체가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은행이 충분한 돈벌이만 된다면 이 같은 구도의 은행 지주회사도 표면적으로는 잘 굴러갈 수 있다. 하지만 저금리로 은행의 수익구도가 직격탄을 맞으면 금융지주 전체가 흔들린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금융지주의 당기순이익 실적(연결기준)은 2011년 8조8,000억원에서 2013년 4조2,000억원으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 은행의 수익 감소가 결정적 원인이다.

◇사라진 도전 정신…. CEO는 연임에만 몰두=하지만 금융지주 내부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겠다는 도전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낙하산이 지주 회장 자리를 꿰차면 맨 처음 만드는 것은 장기 비전보다는 '연임 시나리오'다.



임 전 KB지주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KB 내부의 한 관계자는 "임 전 회장이 자신과 사외이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주의 이사로 선임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사실상 후계자를 키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주 회장의 영욕 옆에서 기생하는 것이 사외이사들이다. 대부분이 교수 출신인 사외이사들은 자리와 자신이 몸담은 학회 등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지주 회장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지주회사 수뇌부가 이 같은 권력구도로 구축되면 당국의 관치금융 앞에서는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내부에 뼈대가 튼튼하지 않은 CEO는 외부에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KB에서는 특히 관치 금융에 반기를 들었던 김정태 전 행장이 당국의 중징계를 받고 물러난 후로는 CEO들이 더욱 몸을 사리는 구조가 됐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은행 입장에서 당국이 추진하는 정책이나 구제금융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밖에 수많은 민원과 청탁에까지 휘둘리게 되면 조직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인 의식 없이는 금융지주 경쟁력 강화도 헛물=CEO가 누가 되든 은행이 모태인 금융지주는 경영의 최우선을 안정성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정성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아예 아무것도 새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지주회사 체제가 존재할 이유도 없다.

사실상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이 전담하는 해외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 영역도 금융지주의 몸 사리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는 지난해 정책금융 개편안에서 민간 금융기관의 대외 역량을 높이기 위해 무역보험공사의 지원 여력을 민간 금융기관으로 쏠리도록 만들어놓았지만 실제 해외 PF 사업에 뛰어드는 국내 금융지주는 전무하다. 정부는 또한 최근 금융규제개혁방안을 내놓으며 금융회사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해외에서 '유니버셜 뱅킹(은행·보험·증권 겸업)'을 허용하기로 했으나 시장에서는 삼성과 같은 산업자본 말고는 해외시장을 노릴 진취적인 금융지주는 없는 것으로 평가 절하하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결국 나름의 철학을 갖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강단과 외풍에 시달리지 않을 CEO 없이는 국내 금융지주가 차별화되기는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은행의 한 전직 CEO는 "은행을 뛰어넘겠다는 진취적 의식과 외풍 차단을 통해 지주 구성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CEO가 나오지 않는 이상 제도를 수차례 바꾼다 해도 금융지주는 달라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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