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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생 100년] 3부. 국민기업의 탄생 <3> 현대차의 상장

"현대차 성장과실 나눠 국민도 돈 벌게해야" 왕회장의 통큰 결단

자본금 늘려 재무구조 개선 등 경영합리화 효과도

1131명으로 시작한 주주 현재 14만7000여명

시총 국내 3위… '글로벌 톱5' 車기업 성장 밑거름

1974년 현대자동차 상장을 알리는 증권업협회의 ''증권 2호''지.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현대차 관련 부분이다. /사진제공=한국거래소

1975년 3월 대한증권업협회가 발행한 ''증권4호''에 실린 현대자동차의 1974년 재무제표 현황. /사진제공=한국거래소

현대자동차는 1974년 기업공개를 거쳐 국민차 ''포니'' ''아반떼'' ''쏘나타'' 같은 베스트셀러를 내놓으며 국민기업으로 거듭났다. 2020년께 현대차 사옥이 될 삼성동 한전부지터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예상도. GBC에는 글로벌 ''톱5'' 자동차 회사의 명성에 걸맞게 115층 건물이 들어선다. /사진제공=현대자동차

1967년 창업 당시 현대차의 서울 무교동 사옥.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오일쇼크'로 경제가 휘청이던 지난 1974년 4월. 현대자동차가 주식공모에 나섰다. 현대차의 주식시장 상장은 당시 일대 사건이었다. 은행·보험업과 국영기업 중심이던 상장기업군이 변하고 증시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대차 역시 이때부터 본격적인 '규모의 경영'에 들어갔다. 국산 자동차가 세계로 향한 것도 이 시기를 이후해서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오늘날, 엔저 여파로 최근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현대차는 여전히 한국 증시를 대표하는 종목 중 하나다. 시가총액 29조6,200억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어 시총 순위 3위다.

현대차의 상장은 국민기업 탄생의 예고편이었다. 상장으로 모인 돈은 현대차가 뻗어 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됐고 기업공개로 일반국민들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974년 대한증권업협회가 발행한 '증권' 2호지는 상장에 나선 현대차를 이렇게 소개했다.

'74. 4. 16 50% 프리미엄부로 매출 모집한 실적이 있는 동사는 자동차 및 자동차 부속품 제조 판매가 주업인 업체로 제6기(7년도) 중 매출액이 179억원으로 당기순이익 20억5,000여만원을 달성하였다. 동사는 최근 2년간의 영업성적 및 자산규모에서 급성장을 보이고 있는데 72년도 국내시장 점유율은 39.8%이다.'

당시 정주영 회장 개인에게도 증시 상장은 막대한 주식매각 차익을 얻을 기회였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현대건설을 상장(1984년)한 뒤 정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현대건설 주식을 공개하면 주식을 사는 사람들이 누군가 말이야. 그것은 돈 있는 사람들과 기관들이야. 그런데 막상 현대건설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키운 사람들, 땀 흘려 일한 노동자들은 주식을 살 형편이 못 돼. 엉뚱한 사람들한테 혜택이 돌아가서는 안 돼. 그래서 따로 생각하는 게 있어."

기업공개의 혜택은 국민과 노동자가 누려야 한다는 뜻이다. '왕회장'은 항상 노동자 편이었고 스스로 노동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실제 현대차는 1967년 설립 이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기업공개로 5명의 대주주 외에 발행주식 총수의 3% 미만을 가진 소액주주가 1,131명이나 됐다. 1,131명으로 시작한 현대차의 주주는 현재 국내외에서 14만7,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일반국민들도 현대차 주식을 사 자산을 키울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현대차의 기업공개에는 정 회장 뜻만 작용한 게 아니다. 우선 정부의 요구 아닌 요구가 있었다. 1972년 정부는 기업공개촉진법을 만들고 경영 투명성 확보와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기업공개를 적극 권장했다. 제조업이면서 당시 주요 업체 가운데 하나였던 현대차도 정부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제가 있었다. 당시 현대차는 이익을 내고는 있었으나 경영환경이 좋지 않았다. 정부는 1970년부터 수년간 긴축재정을 폈고 1971년에는 미국의 달러화 방위조치와 일본의 엔화 평가절상 등으로 기업들이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여기에 오일쇼크는 직격탄이었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시작된 석유파동으로 국내 기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휘청거렸다.



당연히 경영 합리화에 나섰다. 당시 현대차는 △예산회계제도를 통한 내부통제 강화(원가절감) △기획관리 기능 강화 △조직 및 인사관리 효율화 △정신자세 확립 등을 추진했다. 1973년 12월에는 예산 집행일 10일 전까지 월예산 실적 대비표 및 예산신청서를 관리부에 제출하고 예산은 결제 한도에 맞춰 집행하도록 했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경영방식도 바꿨다. 창사 이후 꾸준히 펼쳐온 확대정책을 수익성 위주 경영으로 손질했다. 또 원가절감 차원에서 불필요한 인원의 대폭 감축을 실시했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한정된 내수시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한마디로 '위기'였던 것이다.

기업공개는 경영 합리화의 마지막 단계이며 가장 큰 성과였다. 자본금을 늘려 재무구조 건실화를 도모하고 종합 자동차 메이커로 발전하기 위한 장기자본의 원천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주식공모로 명실공히 국민의 기업으로 새롭게 출발한다는 점도 큰 수확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정 회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던 박정웅 메이텍인터내셔널 대표의 생각도 비슷하다. "자동차는 세계 어디서든 근본적으로 외상이에요. 처음부터 현금을 다 주고 사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엄청난 자본이 필요한 사업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현대차에도 자금조달이 필요했을 거예요. 당시 현대건설은 중동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현대차는 또 달랐죠. 실제 1970년대 초반은 현대차가 매우 어려웠을 때입니다."

결국 현대차의 상장은 국가 시책과 현대차 자체의 필요성, 왕회장의 철학이 일정 부분 맞아떨어진 결과다. 공모를 실시해 국민과 노동자들에게 성장의 과실을 나눠주겠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앞선 사고다.

특히 현대차 기업공개는 성장의 발판이 됐다. 현대차는 상장을 통해 총발행주식 800만주에 자본금이 10억1,765만5,000원으로 증가했다. 1974년에 자장면 한 그릇이 200원이었고 현재 4,000~5,000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단순계산으로도 자본금은 200억~250억원 수준이다. 현대차의 상장 동기는 한양화학지주주식회사(현 한화케미칼)와 지금은 사라진 단기투자금융회사(단자회사)인 대한투자금융 등이었는데. 납입자본금은 각각 28억원과 20억원으로 현대차의 2배가량 됐다.

당시 의미 있는 기업공개로 자금을 모은 현대차는 1976년 '포니'를 생산했고 '쏘나타'와 '아반떼' 같은 히트모델을 연달아 내놓으면서 글로벌 5위 완성차 기업으로 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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