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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수의 머니 서바이벌] (2) 스토리텔링에 속지 말자


“말 잘하면 공산당이다.”

“옛날 얘기 좋아하면 배고프게 산다.”

외할머니가 해 주시던 이 말씀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말의 힘, 이야기의 힘을 순진하게(?) 믿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의 옛날 얘기는 듣고 또 들어도 재미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말과 글은 생활의 수단이 됐다. 10년 넘게 기자를 하다가 금융시장에 들어가 보니, 몇 마디 말로 투자자들을 움직이는 신묘한 능력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

신문 기자들이 쓰는 기사가 아이들이 읽는 동화라면 금융시장의 말과 글은 유무죄를 가르는 최후 변론서다. 재판장은 물론 고객과 투자자다. 하나의 금융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백 가지 사야 할 이유를 준비하고, 천 가지 사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백 가지가 다 마음에 들어서 투자를 했지만, 단 하나 설명하지 않은 투자 위험 때문에 수 백 억, 수 천 억을 놓고 고객과 소송을 벌이는 곳이 금융시장이다.

대형 금융회사의 임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금융산업은 인지(人紙) 산업이다.” 사람과 종이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에 그래프를 그리고, 숫자 몇 개를 써 넣고, 투자 아이디어를 적는다. 이걸 들고 투자자들을 만나 설득한다. 투자자는 아이디어를 사고, 금융회사는 수수료를 받는다. 백지에 쓰인 몇 줄의 글과 직원의 말이 이 산업의 거의 전부다.



금융회사에서 성공하려면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다. 스토리 텔링은 어떤 사건이 어떻게 흘러왔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럴듯한 개연성으로 묶는 힘이다. 예를 들어 브라질 헤알화 표시 국채가 있다. “브라질 국채는 금리가 높다. 요즘 같은 저금리에 매력적이다. 브라질 정부는 믿을 만 한가? 브라질은 자원 대국이고, 좌파 정부의 개혁 정책도 성공을 거뒀다. 월드컵도 열리고, 올림픽도 개최한다. 토빈세가 있지만(지금은 없어졌다) 만기가 긴 채권을 사서 비용을 쪼개면 된다. 더구나 브라질 국채는 만기 1년짜리나 10년짜리가 금리가 거의 비슷하다. 노후 대비에 딱 맞는 투자다.”

대략 이런 얘기가 지난 2년 동안 브라질 국채에 대해 투자자들이 들었던 스토리 텔링이다. 금융회사가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환율 변동 위험이다. 10년 후 어느 시점에 브라질 경제가 나쁜 상황에 처해서 헤알화 가치가 폭락하면 환차손을 입을 수 있다. “브라질 정부가 망하겠어요? 그런 일은 없어요.” 우리나라도 단군이래 최고의 호황기 직후인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다. 심지어 미국도 2008년 리만 브라더스 사태로 만신창이가 됐다. 브라질이 10년 후 안전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사실 스토리 텔러는 10년 후 브라질 국채에 별 관심이 없다. 이 스토리 텔링은 ‘현재의 브라질 국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0년 후에 내가 이 금융회사에 남아 있을 지도 불확실하다. 금융회사의 스토리 텔링은 ‘현재에 대한 것’이지만, 금융상품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이 시간적 간극이 만들어내는 ‘판타스틱 스토리’와 ‘실제 투자 결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할머니 말씀이 옳았다. 이야기(스토리)를 좋아하면 배고프게 살 수 있다. 말 잘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글쓴이 정명수 부소장은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해양학과를 졸업한 후 엉뚱하게 경제신문 기자가 됐다. 1995년부터 서울경제신문에서 증권, 금융 취재 기자로 활동하다가 2000년 이데일리 창간 멤버로 참여, 채권 및 파생상품 기사를 주로 썼다. 2003년부터 2년4개월 간 뉴욕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월가를 취재했다. 이때 기사만 쓰지말고, 금융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보라는 유혹을 받았다. 2006년 채권시장 정보제공업체 코리아본드웹으로 옮겨 시장분석팀을 이끌다가 2008년 리딩투자증권 IB본부 이사로 옮기면서 증권맨으로 변신했다. 2011년 리딩투자증권 자본시장본부, 대체투자본부 상무를 거쳐 리딩투자자문 설립 실무 총괄을 맡았고, 이후 고객 자산운용을 지휘했다. 2012년 기존 금융ㆍ투자업의 틀을 깨는 대안적 투자방안을 제시해보자는 취지로 대안금융경제연구소 설립에 참여, 현재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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