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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청백리 황희 정승
입력2004-09-10 15:56:17
수정
2004.09.10 15:56:17
황원갑 <소설가ㆍ한국풍류사연구회장>
[기고] 청백리 황희 정승
황원갑
황원갑
황희(黃喜) 정승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첫 손꼽히는 명재상이요, 청백리였다. 그는 사소한 일에는 구애 받지 않았고 웬만한 남의 흉허물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던 대범하고 도량 넓은 인격자였으며 멋과 여유를 즐길 줄 안 풍류명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처음부터 매사에 모범적인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황희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으니 처음부터 그의 인격이 고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젊었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들길을 걸어가다가 보니 좀 떨어진 곳에서 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가는 농부가 있었다. 황희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여보시오. 그 두 마리 소 중에 어느 놈이 더 일을 잘 하오?”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거나 못하거나 황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으니 그저 지나가다가 심심풀이 삼아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농부가 일손을 멈추고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저기 저 누렁이는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듣지만 저쪽 검둥이는 일도 잘 안하고 꾀만 부리면서 말도 잘 안 듣는다우.”
황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이, 여보슈! 그런 걸 가르쳐주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 귀엣말을 할 건 뭐요? 거기서 얘기해도 다 들릴 텐데.” 그러자 나이든 농부가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 그건 선비님이 아직 젊어서 모르고 하는 소리외다.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제 흉을 보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수?”
그 순간 황희는 깨달았다. 아하, 그렇구나! 내 공부와 수양이 이처럼 밭 가는 농부보다도 못하니 아직도 멀었구나. 가축조차도 제 흉을 보면 싫어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랴. 내 앞으로 각별히 언행언동에 조심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황희는 더욱 과묵하고 침착하며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했다.
황희는 공민왕 12년(1363)에 송악산 기슭 장단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수(長水), 공양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해에 성균관 학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불과 2년 뒤인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개국됐다. 황희는 망국의 유신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여러 선배의 권유로 새 왕조에 봉사하게 됐다. 그는 벼슬길에서 부침하면서 6조 판서와 우의정ㆍ좌의정을 두루 거쳐 세종 13년(1431)에 영의정이 돼 이후 세종 31년까지 18년간 청백한 수상으로서 명군 세종대왕의 치세를 뒷받침했다.
황희는 자신이 충효를 다하기도 했지만 아들 3형제도 엄하게 훈도했다. 막내 수신(守身)이 한때 기생에게 빠져 관계가 매우 깊었다. 보다 못해 여러 차례 엄하게 꾸짖고 타일렀건만 수신은 그때마다 “네, 네” 대답만 하고는 여전히 끊지 못했다. 하루는 수신이 집에 돌아오자 황희가 관복을 입고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서 오십시오”하고 맞이하는 것이었다. 수신이 놀라 대뜸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까닭을 여쭈었다. 그러자 황희가 대답했다.
“내가 자식으로 대해 바른 도리를 깨우쳐줬지만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니 나 또한 이제부터 너를 손님으로 여겨 손님을 맞는 예우로 대하려 함이다.”
그제야 수신이 방성대곡하며 뉘우치고 다음날부터 기생방 출입을 딱 끊었다고 한다. 수신은 뒷날 부친을 이어 영의정을 지냈다. 85세에 조정을 물러난 황희는 조용히 만년의 풍류를 즐기다 세종대왕 사후 이듬해 향년 90세로 생을 마쳤다.
자유로에서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지나 임진각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에 문산 진입로가 나오고 반구정(伴鷗亭) 들머리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의 반구정은 황희가 노년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 여생을 보내던 유적이다. 정자 아래 그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영당 오른쪽에 그의 동상이 있으며 묘소는 가까운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 나라가 요즘처럼 어지러울수록 태평성대를 이룩했던 황희와 같은 명재상ㆍ청백리들이 새삼 아쉽다.
입력시간 : 2004-09-1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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