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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싸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을지 언정 실제 실행에 옮길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되찾기 위해 늘 신하들과 싸우는 것이다. 책은 조선시대 왕권과 신권의 싸움을 확연히 보여주는 네 명의 왕을 추렸다. 세종, 연산군, 광해군, 정조 등 잘 알려진 왕들이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 역시 말년에는 신하들과 힘든 싸움을 벌였다. 아내 소헌왕후를 여읜 뒤 내불당을 지어 마음의 위로를 받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억불숭유를 내세우며 반대했기 때문. 세종은 단식투쟁에 가출까지 불사했고, 신하들은 연대파업으로 맞섰다.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산군은 언론기관인 삼사와 사사건건 맞부딪친다. 호전적 기질의 연산군은 결국 언관들을 역모죄로 몰아세우고 대대적인 숙청을 벌였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를 통해 왕들의 경연(왕과 신하들이 유교경전을 논하고 국정을 협의하던 회의) 참석 횟수, 친국(왕이 직접 중죄인을 심문하는 일) 횟수 등 객관적 지표를 비교해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낸 것. 세종은 재위 기간동안 경연을 1,928회나 개최한 반면 광해군은 고작 13회 열었다. 광해군은 대신 친국에 210회나 참석했다. 저자는 이를 두고 광해군이 태생적으로 '안전제일주의'에 집착한다고 말한다. 광해군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재위기간 내내 신하들과 친인척을 의심했으며,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을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는 게 저자의 분석. 정조의 인사정책도 인상적이다. 정조는 재임기간 동안 이조판서를 150번이나 갈아치웠다. 관리들의 풍기를 단속하는 대사헌을 오전에 임명했다 오후에 교체한 일도 무려 27회나 됐다. 저자는 정조가 '회전문 인사'를 통해 절대 왕권을 꾀했다고 말한다. TV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네 명의 임금. 이들의 이야기에 다시 눈길이 쏠리는 건 이제 곧 대통령이 바뀌기 때문이다. 고독한 투쟁이 아닌 효율적 업무관리를 위해서 다음 대통령이 어떤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지 조선의 왕들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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