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24일. 카드사 최고경영자(CEO)들은 저녁 늦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금융위원회 주재로 긴급회의를 개최하니 참석하라는 통보였다. 카드사 수장들은 다음날 오전 일정을 취소하고 금융위로 모였다. 당국은 공인인증서 대체수단 개발에 힘써달라는 공허한 얘기만 전달했다. 시간이 아까웠다. 말하지 않아도 준비 중이었던 사안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회의 전날 공인인증서 때문에 중국인들이 여전히 천송이 코트를 못 산다고 질책했다. 당국이 박심(朴心) 때문에 '쇼'를 한 셈이다.
이 촌극은 금융당국과 카드사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겁박하면 따라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카드사가 아무리 떠들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지난달 말 내놓은 금융규제개혁 제안과제 검토 결과만 봐도 알 수 있다. 업계가 눈치껏 걷어내야 할 규제를 당국에 제안했지만 카드를 포함한 중소금융 부문 규제개혁 수용률은 31.6%로 평균 수용률(45.9%)에 한참 못 미쳤다. 반면 은행·보험의 수용률은 각각 52.3%, 39.6%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카드업계는 당국이 규제만 하지 말고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무대를 열어달라고 말한다. 부수업무 영역확대를 꾸준히 외치는 이유다. 해외에서는 아메리칸익스프레스뱅크처럼 카드사들이 온라인 전문은행을 설립할 정도다. 반면 국내 카드사는 신용판매로 땅따먹기만 하고 있다.
카카오간편결제·뱅크월렛카카오 등 지급결제를 넘보는 정보기술(IT) 회사의 금융장벽 허물기가 본격화하는 것은 카드사들이 기존 영업방식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위협의 표시다. 전문가들은 카드 정보유출로 잃은 신뢰를 우선 회복하고 포화된 국내 시장을 넘어 이제는 해외 진출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가맹점 수수료, 연회비, 카드대출 규제라는 삼중고에 빠지다=카드사는 주로 가맹점 수수료, 연회비, 카드대출 등으로 주머니를 채운다. 문제는 당국이 최근 들어 이 세 가지를 모두 옥죄고 있다는 점이다. 5월 금융위는 연 매출 2억~3억원 이하 사업장의 가맹점 수수료율을 2%로 제한하는 내용을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 시행령에 반영하기로 했다. 카드사들은 "또 당했다"며 탄식했다. 2012년 말 대대적인 가맹점 수수료 체계개편이 있었는데 추가로 수익성이 악화될 상황에 처한 것이다. 한 관계자는 "선거철만 되면 가맹점 수수료율을 낮추고 있다"면서 씁쓸해했다. 포퓰리즘 정책의 대표적인 희생양이라는 뜻이다.
연회비에도 비상이 걸렸다. 카드사는 부가서비스를 근거로 연회비를 책정한다. 하지만 당국은 부가서비스 축소를 원천봉쇄해버렸다. 한번 발급되면 5년 동안은 카드사가 부가서비스를 바꾸지 못하게 된다. 상품을 내놓았다가 제휴사가 이를 빌미로 웃돈을 요구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
카드대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금서비스·카드론 등 카드대출 금리는 합리화 작업이라는 명분 아래 더 낮췄다. 이자를 전보다 못 받게 된데다 현금서비스가 줄어 전체 파이도 작아졌다. 올 1·4분기 카드대출 부문 실적(22조2,570억원)은 전년동기(24조270억원) 대비 7.4% 감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체 수수료도 낮아졌다.
삼중고가 닥치자 수익성에 빨간 불이 켜졌다. 자본이익률(ROA)은 2.1%로 큰 이슈가 없던 2011년 대비 0.6%포인트 낮아졌다. 신용카드 시장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승인금액 증가율도 6월 1.8%로 전년동기(2.9%) 대비 떨어졌다. 고꾸라질 일만 남은 셈이다. 카드업계는 순손실이 날 상황까지 우려한다. 한 카드사 임원은 "정보유출 등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각종 규제가 난무해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면서 "올해 안으로 순손실을 보는 카드사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낡은 규제는 풀고 고착된 영업방식 탈피해야=전문가들은 당국이 낡은 규제를 풀고 카드사들은 십수년간 고착된 영업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당국이 내놓은 금융규제 개혁에서 수용하지 않은 내용 중에는 현실감 없는 것들이 많다. 모바일카드 발급 고객에 대한 경제적 이익제공 규제부터 카드발급 고객 경품제공 제한(연회비 10%), 길거리 모집 규제 완화 등이 그렇다. 카드사 고위관계자는 "카드대란의 원흉으로 길거리 모집을 언급하지만 실상을 보면 제대로 심사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발급해준 카드사의 문제였다"면서 "고위공무원도 카드 발급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최근 카드사 심사기준이 높아졌고 한도부여는 적게 해주는 만큼 모집 규제는 과거지향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카드사가 줄곧 주장해온 부수업무 네거티브제 전환도 마찬가지다. 업계는 상상력을 원천봉쇄하지 말고 빗장을 열어달라고 요구한다.
카드사들도 국내 고객에 국한해 카드를 판매하고 대출을 해주는 기존 영업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1월 고객 카드 정보유출 사태가 터져 '카드런'이 일어난 사례는 '신뢰'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웠다. 신뢰가 뚫리자 "카드를 없애버리겠다"고 너도나도 재발급·탈회를 위해 은행·백화점을 찾아 다른 업무가 마비됐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카드사들이 1,000억원대의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할 때 잡음이 많이 일었다. 신뢰회복을 위해 들어가는 돈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생각해 벌어진 사례"라며 "장애인에게 직장을 찾아주는 활동처럼 카드사도 사회적 기업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외 진출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삼성·BC카드는 인도네시아에 각각 모바일간편결제 시스템을 수출했고 프로세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신한카드는 베트남신한은행을 통해 신용카드 발급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지만 성공사례라고 하기에는 미미한 실정이다.
한 카드사 임원은 "해외에서 카드 업무 프로세스를 배우러 올 정도로 한국은 신용카드 선진국이지만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곳은 드물다"면서 "시중은행도 100년을 생각하고 해외 진출을 적극 진행하고 있는 만큼 장기적 관점에서 해외 수익사업을 발굴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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