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현종의 경제 프리즘] 통화 列國志 냉전시절 이라크를 비롯 알제리, 앙골라 등 대표적 친소(親蘇)국가들과 미국과 앙숙이던 리비아와 이란까지도 앞 다퉈 소련보다는 미국에 석유를 판매한데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국제 통화로써 휴지조각 수준인 루블보다 달러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달러의 힘을 앞세운 미국은 더 나아가 1990년 재무부와 CIA가 비밀리에 위조 루블 지폐를 대량으로 유통시키는 이른바 ‘루블 위조 작전’을 펴 쓰러지는 북극곰의 숨통을 마지막으로 죄었다. 일본은 앉아서 기막힌 꼴을 당했다. 만성적 쌍둥이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해결책으로 1985년 뉴욕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고ㆍ달러 약세를 끌어냈다. 이로써 자산을 대부분 달러로 보유한 일본은 곶간에 쌓아뒀던 부의 거의 3분의 1을 한 순간에 날렸다. 기축통화국의 위세로 미국이 일본 엔화에 급제동을 걸어 나라 빚을 사실상 떠넘긴 일대 사건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은 유로 강세를 유도, 유럽에도 역시 비슷하게 짐을 안겼다. 통화는 국력이다. 달러ㆍ유로ㆍ위앤ㆍ엔 사이 힘의 균형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다. 무소불위 달러화의 일극(一極) 체제에 맞서보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건 어쩌면 당연한 세상 이치다. 유럽이 힘을 뭉쳐 탄생시킨 유로가 달러의 독주를 막겠다고 나섰지만 힘에 부친다. 일본도 한때 야무진 꿈을 꾸었지만 지난 1997년 아시아통화위기 이후 꼬리를 내렸다. 이에 비하면 미국과 일전을 벌일 채비를 갖추고 있는 중국의 위앤화는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도전은 여러 분야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통화전(通貨戰)이야말로 미-중간 피해갈 수 없는 대전(大戰)인 듯 싶다. 중국이 궁극으로 목표로 삼는 건 위앤화의 세계 지배. 그 계기를 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으로 삼으려는 게 대륙인들의 계획이기도 하다. 홍콩, 마카오, 타이완과의 공동 통화계획을 마련해놓고 유로와도 제휴해 힘을 축적, 엔까지 집어삼켜 아시아공동통화의 길을 간다-권모술수에 능한 위앤화의 전술이라는 국제미래과학연구소의 하마다 가즈유키 박사의 진단이다. 쫓는 위안, 쫓기는 달러가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통화의 힘은 각국의 정치ㆍ경제ㆍ군사ㆍ기술력의 결과다. 동시에 이들 요소를 어떻게 적절히 조합하고 구사할 건지 전략을 짜는 능력이 한 나라의 미래를 정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국제 외환 시장의 가파른 변동성이 가뜩이나 힘든 국내 경제를 더욱 흔들어 대는 게 오늘 한국 경제가 맞 ?M뜨린 현실이다. 혼선만 이어질 뿐, 판세를 정확히 읽어내야 할 외환 부문에서도 정책의 경직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상황은 그래서 더 답답하다. 열강들에 둘러싸여 지정학적 요인으로 나라를 빼앗긴 게 20세기 초 한국의 근세사다. 현대판 한반도는 4대 통화 사이에서 여전히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형국이다. 그저 한 세기란 시간차만이 있을 뿐이다. hjhong@sed.co.kr 입력시간 : 2004-11-16 17:22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