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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권력 상징서 조미료로 전락한 소금의 역사

■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유승훈 지음, 푸른역사 펴냄)


고대의 소금은 절대자의 권위와 힘을 상징했다. 그래서 소금의 염(鹽) 자를 풀면 신하(臣)가 소금 결정(鹵)을 그릇(皿)에 두고 지킨다는 뜻을 갖는다. 영어도 마찬가지인데, 봉급을 뜻하는 샐러리(Salary)의 어원이 바로 소금(Salt)이며 로마 병사는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으로서 소금의 위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날의 소금은 음식의 간을 맞추는 조미료 정도로 전락했으며 염분과다로 인한 만병의 원인으로 '천대'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인 역사민속학자 유승훈이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 강점기와 현대까지 소금의 경제ㆍ문화적 함의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면밀히 살폈다.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라는 부제로 소금이 주인공인 한국문화사를 정리했다.

염전 일은 '귀신도 못 따라 하는 일'이라 할 정도로 힘들었기에 소금을 구하는 일이 어려웠고 정부는 긴요한 세수인 소금을 두고 생산과 유통을 숙제거리로 안고 있었다. 고려는 '도염원'이라는 관청을 설치해 국가가 소금의 제조ㆍ배급ㆍ판매를 총괄했지만 민중 착취라는 허점을 낳았다. 그 폐단의 대표사례가 고려 충선왕(1275~1325)때 시행된 각염법. 당시 정부는 소금을 독점해 정해진 가격에 일률적으로 판매했다. 그러나 지급 전 선불로 돈을 받아놓고 소금을 제때 주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다. 유통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데다 권세가들에게 먼저 몫이 돌아간 탓이었다. 그 결과 천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은 10년 동안이나 소금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경우 이 같은 폐단을 없애고자 염세제 개혁에 대한 고민을 '경세유표'에서 주장했다. 정약용은 정부의 세제 개혁을 촉구하며 지방마다 들쭉날쭉한 소금세 제도를 통일하고 징수량을 공평하게 조절하는 '평미레 개혁론'을 내놓았다.



고려와 조선을 거친 소금의 '짠 역사'는 근대와 현대까지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때는 북한 지역에 천일염전을 집중적으로 건설한 탓에 해방과 분단 후 남한은 혹독한 '소금 빈곤'을 감내해야 했다. 이에 정부는 무분별한 염전 사업을 벌였고 '소금 과잉'의 후폭풍은 강제로 염전을 줄여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저자는 지적했다.

10년 이상 소금을 연구해 온 저자는 역사적 사실 외에도 귀신을 잡기위해 뿌리는 소금의 주술적 힘, 성욕을 강화시키고 다산을 부르는 '생산과 풍요의 상징', 음식 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문화의 구성요소로서 소금의 다양한 면을 문화사적으로 조망했다.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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