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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 앤 조이] 차가운 돌에서 느끼는 뜨거운 교감

■ 미켈란젤로의 후예 박은선<br>조각의 성지 伊 피에트라산타서 활동<br>동양적 여백·사색 담은 추상작품 발표<br>"돌 깨고 붙이는 작업은 인생의 축소판"

(왼쪽 위)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야외조각전

꺽인 기둥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는 육중한 돌에서 잠들어 있는 인간, 고통받는 노예를끄집어 냈다. 50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조각가 박은선은 화감암과 대리석에 '숨통'을 틔워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만들어 냈다. 이들 두 작가는 시간을 뛰어넘어, '성스러운 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 피에트라산타(Pierasanta)에서 조우했다. ◇제2의 고향 피에트라산타, 미켈란젤로의 후예 미켈란젤로는 꿈틀대는 생명성의 영감을 줄 '돌'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카라라 옆 해안도시 피에트라산타에 눌러 앉았다. 르네상스의 최고 조각가로 꼽히는 거장은 이곳에서 꼬박 3년간 머무르며 작업을 했었다. 그때부터 이어져 온 조각가들의 열정은 지금도 창연하다. 마리노 마리니, 후안 미로, 헨리 무어 같은 20세기 대가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요즘도 페르난도 보테로, 줄리아노 반지 같은 유명 조각가들이 작업하고 있으며 미국의 제프 쿤스나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 마크 퀸 같은 현대미술가들도 돌작업 만은 피에트라산타의 공방을 찾는다. 마을 광장의 노천카페는 입구 벽면에 '미켈란젤로가 다녀간 곳'이라는 문구를 자랑스럽게 새긴 채 지금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박은선 작가가 집을 나서 작업실로 향하는 아침 출근길이나 저녁 산책길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작업노트를 끼적거리는 바로 그 카페다. 경희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뒤 1993년에 이탈리아로 건너 간 그는 "조각의 본고장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다짐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한국 작가들 대부분이 귀국했지만 그는 고생스런 시간을 버텨냈다. "저에게는 제2의 고향인 피에트라산타는 거주민 대부분이 장인들로 이뤄져있다고 해도 과언이아니죠. 인구 5만명의 우리나라 읍 정도 크기의 소도시지만 이곳을 거점으로 정기적으로 오가며 작업하는 조각가 유동인구는 300명이고 갤러리만 20곳이 넘습니다. 여기에 세계적인 청동공장 12개에 대리석 공장 수십개가 있으니 조각가로서는 최고의 지역이죠. 피렌체에서 40분 정도 거리인데 순수미술과 현대미술이 공존하고, 저와 같은 공방에서 영국작가 데미안 허스트가 신작을 만들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합니다." 잘 견뎌낸 덕분인지 세계적인 '조각 성지'인 시(市)가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3년 전의 시립조각공원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의 유럽 내 인지도와 명성은 날개를 달았다. "시에서 개인전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깜짝 놀랐고요, 정말 뿌듯했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한국이라는 나라조차 생소하게 여겨졌었는데 이제는 보테로 같은 유명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랑스럽게 작품을 선보였으니까요. 시의 지원을 받아 6m 이상의 대작 10여점을 전시했고요. 4개월의 전시기간 내내 조각공원에서 각종 토론회와 행사가 열려 방송을 통해서도 제 작품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휴가철과 겹쳐 휴양지로서 해변도시를 찾은 유명한 컬렉터들과의 인연도 이 때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아파트가 보편적인 우리와 달리 주택과 정원이 잘 갖춰진 유럽인들은 미술품 수집의 정점에 조각을 둔다. 네덜란드의 한 컬렉터는 그의 작품만 22점을 갖고 있고 이탈리아 자동차회사인 피아뜨 계열사의 한 회장은 10여점을 소장했다. 스위스 취리히국립대학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의 제약회사에서도 자랑스런 한국인인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 마이애미의 로얄캐리비언 크루즈도 6점을 구입해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호화 유람선이 박은선의 조각을 싣고 뱃길을 누빈다. 올 4월에는 피렌체에 위치한 세계적인 마리노마리니미술관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이 열리는 영예를 안았다. ◇돌덩이에 숨통을 열어 준, 동양적 추상조각 유럽의 미술애호가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은 동양적인 여백의 미와 사색이 추상적인 조각에 차곡차곡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색이 다른 2~3가지의 돌을 교차해 붙여 기둥처럼 쌓아올리는 기하학적 조각이다. 을지로 하나은행 본사나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 자리잡은 작품은 지나다니다 한 두 번쯤 봤을 법한 대표작. 직선과 곡선, 육면체와 구가 공존해 쌓인 세련된 추상조각이다. "작품 스케치를 한 다음에 두께를 정하고, 어울리는 색의 돌덩어리를 장만합니다. 서로 다른 색의 돌을 정교하게 자른 뒤, 다시 교차로 포개 한 덩어리로 만듭니다. 깨고서 다시 붙이는 작업은 해체와 구축의 반복이며, 원래 하나였던 원석(原石)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인생과도 같죠. 다른 색깔의 돌이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 이중성의 교합, 인간이 추구해야 할 평형성과 균형감각을 보여줍니다." 카라라 산(産) 하얀색 대리석이나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분홍색 로자(Rosa) 같은 고급재료의 '귀한 맛'이 있지만 참맛은 작가가 만든 돌의 '숨통'에 있다. "깨진 틈처럼 보이는 부분을 저는 '숨통'이라 부릅니다. 설산(雪山)같이 하얀 카라라의 석산(石山)에서 큰 돌이 쪼개지며 숨쉬는 것 같은 '스아악'소리를 내며 돌가루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것이 뚫리며 느끼는 후련함 말이죠." 그렇다면 유럽의 미술애호가들은 왜 이토록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동양적인 사유와 여백의 미가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형태의 반복은 일정한 리듬감과 율동감을 만들어내죠. 생명이 없는 돌에서 느껴지는 숨결과 기둥 하나로 주변 공간을 제압하는 여백의 미에서 동양적 추상미를 느낀다고 하더군요. 동양미를 의식적으로 강조한 적은 없지만 제 몸에 체화된 기본 바탕이나 내가 자란 곳의 동양적 기운이 은연중에 배어나옵니다. 오히려 긴 외국생활로 이탈리아적 경향이 스며든 것도 같은데요."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돌기둥을 통해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끝없는 욕망'이다. "누구나 출세하거나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습니까. 무한히 쌓아도 끝이 없는 게 사람의 욕망이죠. 제 경우는 그 욕망이 '작업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것이 무한기둥의 형태로 표현되는 듯해요." 작가는 이번에 제21회 선(選)미술상을 수상해 오랜만에 고국을 방문했다. 인사동 선화랑에서 27일까지 기념전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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