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15일 미국 워싱턴에 모인 전세계 20개국(G20) 정상들은 사상 유례없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통화와 재정정책에서 공조하고 금융시장에 대한 구제ㆍ감독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정상들은 특히 “12개월간 보호무역조치를 새로 만들지 않고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지키겠다”는 내용의 공동선언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약속은 불과 몇 주도 안돼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워싱턴을 떠나자마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각국이 경쟁적으로 자국 산업보호를 위한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은 것이다. 보호주의 경쟁에 불을 붙인 것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의 파산을 막기 위해 미 재무부는 174억달러의 긴급자금을 투입했다. 미국은 한술 더 떠 8,19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법안에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조항까지 만들었다.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은 경기침체로 고통 받는 여타 국가들로 급속히 확산됐다. 미국의 자동차 구제는 보조금 지급이라며 강력 반대하던 유럽연합(EU)과 일본 등이 잇따라 비슷한 조치를 취하거나 검토하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23억파운드(약 4조6,000억원)에 달하는 자동차산업 지원책을 내놓았다. 앞서 프랑스는 10억유로의 신차 구입 장려금을 지급하기로 했으며 추가로 60억유로(79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긴급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은 GM 산하인 오펠의 자금융통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 보증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 지원대상은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반도체시장의 불황이 확산되자 일본과 대만ㆍ독일 등에서 정부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대만 정부는 메모리반도체 회사를 위해 2,000억 대만달러(약 60억달러)를 지원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의 공장’ 중국의 보호주의의 물결도 거세다. 경기침체의 골이 깊어지자 자동차ㆍ항공 등 자국 산업에 대한 직접 지원에 나섰다. 중국은 ‘미국식’ 자동차산업 구제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문제는 정부 지원이 기간산업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다.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 업체들이 부실을 내세워 정부 지원을 요구했으며 헤지펀드에서 포르노 업계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서 손을 벌리고 있다. 각국이 보호무역적 정책을 취하는 것은 당장의 이익에 주목하겠다는 것. 하지만 이 같은 결정들은 침체에 빠진 세계경제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경쟁력 없는 기업이 정부의 지원으로 연명하면 경기회복은 지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1930년대 대공황 때도 각국은 초기에 공조를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도 공조 약속을 먼저 파기한 곳은 미국.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농업 부문에서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결과적으로 전 산업에 걸쳐 장벽을 두르게 됐다. 그 후 1~3년 사이 국제 교역량은 3분의1로 격감, 경기침체가 장기화됐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은 보호무역 색채가 상당히 짙다”면서 “1930년대 대공황에서 경험했듯이 국제무역을 축소시키고 이로 인해 경기회복이 지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는 “경제가 어려울수록 무역을 저해하는 수단에 끌리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매우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면서 “1930년대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 각국이 취했던 무역규제들은 대공황의 후폭풍을 장기화하면서 무역전쟁으로 비화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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