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모(65)씨는 평소 손녀 한 명만 키우는 며느리가 못마땅했다. 벼르고 벼른 끝에 "나이 더 먹기 전에 동생 낳아야지"라고 한마디 했다가 아들과 한바탕 다퉜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운 김씨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인데 아들은 "보태줄 것 아니면 아무 말씀 마시라"고 잘라 말했다. 김씨는 노년의 빠듯한 형편을 뻔히 아는 아들 내외가 괘씸하면서도 서운했다.
#직장인 이모(34)씨는 출산 후 1년간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말을 꺼냈다가 상사로부터 "1년이나? 그냥 쭉 쉬지 그러냐"는 핀잔을 들었다. 눈치가 보였지만 어쨌든 휴직을 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직장 어린이집도 없고 양가 부모님께도 맡길 수 없는 상황에서 1년 뒤를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극심한 저출산 현상이 우리 사회에 드리운 그늘은 생각보다 훨씬 짙다. 대한민국이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급속히 재편되는 사이 출산·양육환경은 그 속도를 턱없이 못 따라갔다. 저출산은 생산인구 부족과 성장동력 약화에 따른 국가적 위기로만 번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이루는 기본단위인 가족과 사회의 갈등으로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
◇자녀는 생산재가 아닌 '소비재'=우리나라는 어느 나라보다 빠른 인구 변천사를 겪어왔다. 지난 1960년대만 해도 6.0명이던 출산율은 1983년 2.06명으로 그나마 인구를 유지하는 수준까지 떨어지더니 2001년 이후로는 줄곧 1.3명 미만이다. 지난해 태어난 신생아 수는 43만6,000명으로 1980년(86만 명)의 절반에 그쳤다.
저출산의 배경에는 자녀에 대해 180도 달라진 요즘 세대의 인식이 깔려 있다. 농업사회에서는 자녀가 가업을 분담하고 물려받아 부모를 부양하는 사실상 '생산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 가업은 사라졌고 노후부양 기대감도 약해졌다. 자녀는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소비재'로 바뀌었다는 지적이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자녀 출생부터 대학 졸업까지 22년간 자녀 1인당 양육비는 3억896만원이 든다. 소비재라도 매우 비싼 소비재인 셈이다. 송유미 대구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부모는 주어진 예산의 제약 아래 자신들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자녀 수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돼버렸다"고 설명했다.
◇보육 인프라 부재로 내몰린 '가족의 위기'=전통적 '효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만한 시스템이 미비한 상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육아를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가족 단위의 경제적ㆍ심리적 고통이 날로 커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맞벌이 부부 510만가구 중 250만가구가 조부모 육아를 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두 명 중 한 명꼴이다. 황혼 육아에 치이는 조부모의 건강악화와 세대 간 갈등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문제다.
가족 간 육아 품앗이 비중이 높은 것은 보육 인프라가 미덥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실제 민간중심의 보육 서비스 공급체계는 양적 팽창에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공공성과 신뢰도에서는 여전히 낙제점이다. 깜깜이식 육아도우미, 유아 관련 업체들의 과소비 조장 등이 얽히면서 시장왜곡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갈등전선의 확장…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강화해야=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육아를 맡길 만한 지역사회는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나마 그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집단이 기업이다.
그러나 기업들은 여전히 가족친화적 근무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비용 혹은 규제'라고 인식하며 발을 뺀다. 출산·육아 등 가족 문제에 대해 방어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일터 분위기는 '세대갈등의 전선(戰線)'을 가족에서 직장,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확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족친화적인 근무환경이 장기적으로 회사 경영성과에 유리하다는 점은 선진국에서 이미 입증된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제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게 관건이다. 원소연 한국행정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가족친화인증기업 제도에 대해 지금보다 강력한 인센티브 전략을 써 가능한 한 많은 기업의 참여를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