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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전통마을…600년 정취 살아 숨쉬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에 들어서면 기와지붕이 화려한 '향단'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노모 봉양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난 회재 이언적을 위해 중종이 하사한 집이다.

경주 양동마을에 있는 월성 손씨 종가 '서백당'의 안채.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안동 하회마을 전경.

하회마을의 삼신당으로 향하는 골목길의 돌담과 흙담.

양동마을
골짜기마다 아기자기한 집들
유교적 전통 고스란히 간직
무첨당 등 세련된 조선건축도

하회마을
강줄기 바라보는 방사형 마을
기와집 돌담·초가집 흙담 조화
길거리 돌 하나하나에도 운치
지난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을 한껏 받은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에도 어느덧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벌판이 노랗게 물든 넉넉한 가을이 찾아왔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실사단이 방문해 찬사를 터뜨렸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 둘러봤다. ◇경주 양동마을=성종 15년, 1454년에 경북 청송 출신의 양민공 손소공은 경주에서 50리(20㎞) 정도 떨어진 양동마을의 류씨 집안 무남독녀에게 장가를 들어 이곳에 새 터전을 잡았다. 조선 전기인 당시만 해도 처가살이는 흠이 아니었으니 월성 손씨 가문의 입향조가 된 그는 이곳에 '서백당'이라는 집을 짓고 600년 가까운 씨족마을의 역사를 시작했다. 손소공은 결혼 2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고 중앙정계로 진출했고 공신으로 토지를 하사 받아 이 지역에 탄탄한 뿌리를 내렸다.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에서 네 줄기의 능선이 뻗어 물(勿)자형 지형을 이루는데 골짜기마다 아기자기한 집들이 들어앉아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깊은 자리,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집이 월성 손씨 종가인 서백당이다. 참을 인자를 백 번 쓰는 선비정신을 뜻하는 '서백당'은 풍수가 탁월해 영남의 4대 길지 중 하나로 꼽힌다. 집터를 잡아준 풍수가는 혈맥이 응집된 이곳에서 "3명의 위인이 나온다"고 예언했다 하는데 그 첫 인물이 손소공의 차남이자 조선의 청백리 충신인 손중돈, 두 번째 인물이 이곳을 외가로 둔 문원공 회재 이언적이다. 세 번째 인물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며 동네 사람들은 은근한 기대를 품고 있으며 손씨 문중은 외손 이언적의 사례를 되새기며 "딸에게는 (출산을 위해) 안채를 내줘서는 안 되겠다"는 농 섞인 얘기가 돈다. 종가의 사랑채 마당에는 집과 나이가 같은 아름드리 향나무가 구불구불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으며 마을 전반의 빼어난 경관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걸어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는 여강 이씨의 종가 무첨당(보물 411호)이 있다. 1508년에 지어진 여강 이씨의 종가이며 회재 이언적의 부친이 살던 집이다.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의 무첨당은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인 이의윤의 호에서 유래했다. 별당 기능을 중시한 세련되고 간결한 솜씨의 조선 건축을 볼 수 있다. 마을 초입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향단'도 빼놓을 수 없다. 이언적이 노모의 병환을 돌보겠다고 사직을 표하자 만류하던 중종이 1543년에 하사한 집이다. 때문에 당시 궁에서나 쓸 수 있던 두레기둥을 사용했으며 파리 눈 모양의 한옥 장식인 화련대공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처음엔 흥(興)자형 99칸 집이었으나 지금은 56칸만 남았다. 회재 선생이 중앙으로 이임하자 동생 농재 이언괄이 물려받아 평생 노모를 모셨으며 지금은 농재의 16대 종손 이욱씨가 서울의 대기업 생활을 청산하고 지난해부터 종가를 지키고 있다. 유교적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양동마을은 기와와 초가가 공존하는데 초가집은 부자 양반의 기와집보다 조금 낮게 위치해 계층 차이를 반영한다. 마을에서 들판으로 나가는 길목 옛날 주막 자리였던 '정순이가옥'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나무울타리와 흙담이 애틋한 향수를 자아낸다. 정순이 할머니는 관광객에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꼿꼿이 사는데 햇볕에 말리는 빨간 고추과 처마에 매달린 양파ㆍ마늘 등이 생의 고마움을 일깨우는 풍경을 전해준다. ◇안동 하회마을=경주에서 200㎞ 남짓 떨어진 안동 하회마을은 우선 마을 서북쪽 강 건너 절벽인 '부용대'에 올라 전반적인 지형을 살펴본 다음 세부탐사를 시작하는 게 좋다. 왜 '강물이 돌아나간다'는 뜻의 하회(河回)라 부르는지, 왜 이 마을의 지세를 물 위에 연꽃이 떠오른 '연화부수형'이라 하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용대에서 본 마을의 집은 종가인 '남촌댁'을 제외하고 제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한옥의 기본은 남향이나 이곳은 강을 바라보는 '방사형'으로 마을이 이뤄졌다. 마을 형세가 짐을 가득 실은 배(船) 같다고 하는데 배에 구멍을 뚫으면 안 된다고 해 우물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부용대에서 일년에 딱 두 번 열리는 '선유줄불놀이'는 지역 명물이다. 요즘식으로 일종의 불꽃놀이인데 뽕나무로 만든 숯을 가늘게 찧어 소금을 넣고 50㎝ 길이의 가는 막대를 만들어 불을 붙이면 소금의 나트륨이 타면서 탁탁 거리는 소리와 불꽃을 낸다. 양반 문화의 하나로 선비들은 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읊으며 이를 즐겼다고 한다. 매년 9월 마지막주부터 10월 첫주까지 열리는 '하회 탈 축제' 기간 두번의 토요일에 볼 수 있다. 부용대에서 나루터로 내려오는 길에 서애 류성룡이 1586년 지은 '옥연정사'를 만나볼 수 있다. 맑은 물이 옥빛 같다고 해 옥연(玉淵)이라 불리는데 서애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한 징비록을 쓴 장소로 의미가 깊다. 절벽 아래서 강 건너 마을까지는 나룻배가 사람을 실어 나른다. 원래는 노를 저어 이동하는 것이었으나 최근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배에도 모터를 달았다 한다. 나루터 근처에는 한류스타 류시원의 집도 있다. 서애 13대 지손인 류시원의 인기로 외국인 관광객 방문이 많으며 단아한 현대식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다.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서애의 말을 따라 이름이 붙었다. 대문에 들어서면 한눈에 보이는 현판의 전서체 글씨는 화재로부터 집을 보호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당시 문중 회의가 열려 "여왕도 여인이시니 손님용 사랑채보다는 안채를 내어드리자"는 결론을 내렸던 대청마루까지는 일반 관객이 들어갈 수 있다. 600년 역사를 짊어진 22대 종손이 안채에 살고 있다. 하회마을은 늘어진 감나무, 길거리 돌 하나에도 운치가 서려 있다. 그 중 삼신당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가장 빼어나다. 왼쪽에는 기와집의 와담이, 오른쪽에는 초가의 흙담이 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제각각 빌어놓은 '소원쪽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삼신당은 정월대보름 하회탈춤이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을의 또 다른 중심인 '북촌댁'은 1797년 류사춘이 짓고 증손자 류도성이 1862년에 증축한 집이다. 규모가 웅장하고 대갓집의 격식을 완벽하게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큰 사랑채 뒤편의 소나무가 하회마을을 감싼 강물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이곳 안동은 인구 17만 명이 채 안 되는 지역임에도 47개 씨족마을과 87개 종가를 갖고 있다고 하니 명실상부한 양반 고을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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