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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프론티어] 국제 영화제 휩쓴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

이창동 감독 조감독 시절 작품 써 연출·각본서 배우역할까지 소화<br>실제 친구였던 전승철씨 모델로 탈북자들의 어두운 현실 다뤄<br>생활고 시달린 영화계 88만원세대 "한때 꽃게잡이 배도 타봤어요<br>슬픔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가 꿈"



영화제 상금만으로도 제작비 회수… 일약 독립영화계 스타로 14일 개봉하는 영화'무산일기'는 개봉도 하기 전에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 만으로 이미 제작비 8,000만원을 모두 회수했다. 덕분에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직접 연기까지 한 박정범(34ㆍ사진) 감독은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 해외 여행을 실컷 하고 있다. 최근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이렇게까지 주목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박 감독은 자신을 영화계의 '유령'이라고 표현했다. 영화학과는 거리가 먼 체육교육(연세대)을 전공했고 독립영화계에서 널리 알려진 스타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장편 데뷔작 '무산일기'를 들고 나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과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시작으로 제 10회 마라케쉬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았으며 올해는 제 40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대상 및 국제비평가협회상, 제 13회 도빌 아시안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등 국제 영화제를 휩쓸었으니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존재란 의미다. 4~5월에도 그는 7개의 해외 영화제에 초청돼 부지런히 출ㆍ입국을 반복해야 한다. 장편 데뷔작으로 해외 영화제를 휩쓸고 연출과 각본ㆍ배우까지 모두 소화했다는 점에서 박 감독은 2009년 25개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며 화제가 된 영화'똥파리'의 양익준 감독과 오버랩된다. 하지만 그는 과찬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양 감독님은 독립영화계의 스타였어요. 작품도 영화제 수상뿐 아니라 흥행까지 성공했고요.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가 없겠어요. "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느냐고 묻자 어색하게 앉아있던 그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1998년 군대에서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하나비'를 보고 감명을 받아 영화를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복학 후 2000년에 교양과목으로 영화 제작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수업 과제로 찍었던 단편 '사경'이 '연세 영화상'에서 대상을 타게 됐다. 당시 수업을 가르쳤던 전찬일 선생(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 영화를 다시 찍어보라고 해서 또 다른 단편'사경을 헤매다'를 찍었는데 이번에는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대상과 관객상을 받고 뉴욕국제독립영화제에도 출품된 것이다. 대학생 때 만든 작품으로 뉴욕까지 다녀오며 승승장구하는 듯했던 박 감독은 이후 영화계에서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영화사에 들어가 숱한 시나리오들을 썼지만 영화화되지 못한 것이다. "'사경'이 코미디영화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게 잘 만든 코미디 영화를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쓴 시나리오들은 코미디도 아니었고 상업적이지 못했던 거죠." 시나리오가 번번이 영화화되지 못하고 엎어지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7년 동안 공사판에서 막노동도 하고 공장에서 전기공으로도 일했으며 꽃게잡이 배까지 타며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전 체육을 했던 사람이라 그나마 몸이라도 써서 돈을 벌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영화지망생 대다수가 시급도 얼마 되지 않은 알바를 하면서 꿈을 키워요. 제 다음 영화 연출부 중에는 라면 집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어요. " 그의 말처럼 최근 젊은 예술인들, 특히 영화 스태프들의 생활고가 영화계에서 논란이 됐다. 하지만 한편에선 영화계에 인력이 너무 많이 몰리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는 "버블 시네마 시절(2000년대 초ㆍ중반 한국 영화 붐이 일어난 때)이 영화인들에게 너무 많은 환상을 심어준 건 사실이지만 인력이 많으니 취업난과 생활고가 당연한 거라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라며 "영화계에 사람이 많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기보다는 구조적 모순이 쌓이니깐 썩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저예산 영화의 경우 맨먼저 인건비를 줄이는 게 너무 당연시돼 있고 또 인건비를 지불하더라도 촬영이 지연되면 계약 기간보다 더 많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정당한 급여를 지불하지 않고 스태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영화인들의 생활고는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감독은"이건 문제의식 수준이 아니라 기본적인 양심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박 감독은 자신이 '무산일기'를 찍을 수 있었던 건 '생활안정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무산일기'의 시나리오를 쓴 2008년 12월 당시 박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조감독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무산일기'의 전신인 단편 영화 '125 전승철'을 본 이 감독이 그에게 조감독 자리를 준 것이다. "이창동 감독님의 조감독 자리는 영화 지망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라 정말 기뻤죠. 게다가 이 감독님은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동안 할 일이 없는 연출부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휴가를 주십니다. 이 기간에 저는 '무산일기' 시나리오 작업을 할 수 있었지요."당시 4개월 동안 미리 받은 계약금이 박 감독의 시나리오 작업을 뒷받침해준 셈이다. 탈북자의 삶을 다룬 영화'무산일기'는 박 감독의 실제 후배 전승철 씨를 모델로 만든 작품이다. 5년 동안 구상해온 작품이라 시나리오는 12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탈북자로 남한에서 생활하던 전승철 씨는 위암 투병 끝에 사망했다. 박 감독은 "승철이도 영화를 하고 싶어했다"며 "살아있었다면 제가 상 탄걸 보고 좋아해줬을 것"이라고 쓸쓸하게 말했다. 처음에 그는 탈북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승철 씨와 친해졌는데 그와 친해질수록 북한에 대한 실상과 탈북자가 어떻게 남한에서 살아가는 지 알게 됐다."북한에서는 길거리에 아는 사람이 죽어 있어도 일상 다반사니깐 그냥 지나간다고 해요. 폭력적인 일상에 빠져 사는 거죠. 그렇게 힘들게 남한에 왔는데 남는 건 나아지지 않는 삶과 탈북자끼리도 배신하는 생존뿐이라고 하더군요. " 박 감독은 탈북자를 떠나 친구였던 승철 씨를 떠나보낸 슬픔과 분노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실제 밝고 쾌활했던 모습이 아닌 영화 속 승철 씨는 어둡고 주눅 든, 그가 생각하는 탈북자의 이미지로 표현했다. 영화 속에서 탈북자들은 같은 하늘 아래서 한국인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위험천만한 거리의 바리케이트에 아슬아슬하게 포스터를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나마도 다른 사람들의 텃세에 못 이겨 일자리를 뺏기는가 하면 탈북자들끼리 서로 배신도 잇따른다. "제가 느낀 탈북자들의 삶은 견디고 견디다가 결국 쓰러지는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영화도 어둡게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첫 장편은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사실 그의 꿈은 밝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내공을 좀 더 쌓아서 밝음을 채우고 싶다"는 박 감독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처럼 완성도도 높고 관객들이 슬픔을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고 생각해요. 악한 순간과 선한 순간이 있을 뿐이죠. 사람을 계속 구박해서 구석에 몰면 어두워지고 악해질 수 밖에 없잖아요. 저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순간을 전파해보고 싶습니다."
"남한에 가면 삶이 나아지겠지" 희망 안고 왔지만…
●영화 '무산일기'는 경계선을 넘어왔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만 지나면, 이것만 넘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삶은 또 다른 과제를, 새로운 시련을 안긴다. 전승철은 국경을 넘었다. 함경북도 '무산(茂山)'이 고향이었다. 국경을 넘으면서 죽은 친구의 시체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지나쳤다. 남한으로 가면 새로운 친구도, 잃어버린 자존감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렇게 찾은 남한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산(茂山)'을 벗어났더니 '무산(無産)'일 뿐이었다. 시급 4,000원짜리 직장일지라도"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지만 탈북자를 의미하는 주민등록번호 앞의 '125'라는 세자리 숫자에 튕겨 차갑게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 왔지만 여전히 '무산(茂山)'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무산일기'는 불편한 작품이다. 감독은 우리 나라에 섬처럼 떠도는 탈북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그는 우리가 탈북자의 삶에 관심을 갖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때론 다소 과장된 메시지까지 부여하며 관객을 탈북자의 삶 속으로 밀어넣는다. 견고한 내러티브 속에 드러나는 지독한 리얼리즘은 그의 스승인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박 감독이 자신의 실제 후배를 모델로 만든 전승철이라는 인물은 그가 생각하는 탈북자 이미지의 결합이다. 영화 속 전승철은 그림자처럼 움츠러들어 있고 엑스트라처럼 가끔 해야 할 말만 나직이 읊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새로 찾은 사회 속에 녹아들고 싶은 열정이 엿보이던 청년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게 지속적인 시련을 주는 건 남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남한 사회에 정착시켜주려 애쓰던 경찰도, 함께 탈북한 친구조차도 그를 알 수 없는 더 높은 벽에 부딪히게 만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무심코 그의 행적을 따라다니던 관객마저 얼어붙게 만들어버리는 무기력함의 원인은 영화를 보는 모든 이에게 숙제로 남을 것이다.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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