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역사의 강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어디선가 물줄기가 굽이치는 곳에서 시대정신을 만나게 된다. 봉건제에서 왕정으로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로 물줄기가 바뀌는 그곳에서, 또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권위적 진리에 의심을 품은 갈릴레오와 그의 지적 후계자들의 생각에서. 그리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의지를 불태웠던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시대정신의 깃발은 늘 펄럭이고 있었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에서 시대정신은 폭력적인 집단행동이 아닌 평화적인 선거과정을 통해 표출되고 정부의 정책과정을 통해서 삶의 현장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풀어놓는 핵심 정책은 바로 시대정신의 아들이며 딸이다.
지난 2003년 정부발의와 여야 합의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경제자유구역 정책도 분명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1997년에 시작된 혹독한 외환위기의 시련, 그리고 일본의 고도기술 경제와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를 돌파하기 위한 한국판 홍콩ㆍ싱가포르 개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이후 10년이 지나는 동안 경제자유구역은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각 지역별 산업단지 조성 정책과 별반 다르지 않게 취급되고 있다. 그러니 재정지원 규모는 줄어들고 규제완화도 소 걸음이다. 경제자유구역이 아닌 '경제규제구역'이라는 비아냥도 들린다. 한때 경제자유구역을 통해 우리의 경제적 고민을 해결해보겠다던 그 시대정신이 무대를 옮긴 것일까. 3~4% 대의 저성장 구조 고착, 저출산ㆍ고령화 등으로 인한 경제인구 감소와 복지비의 대폭적 증가, 신규투자 기피, 가계부채 증가 등 지금의 우리 경제는 그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복지와 나누기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임은 분명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성장이 있어야만 더 많은 복지, 더 많은 나누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경제의 주 무대가 글로벌로 옮겨간 현실에서 홍콩과 싱가포르 같은 개방의 거점을 만드는 경제자유구역 정책은 여전히 성장과 일자리 만들기에 중요하고 또 유효한 정책이다.
누구나가 동의하듯이 한정된 자원과 시간 속에서 가장 큰 성과를 내는 전략은 '선택과 집중'이다. 아직도 늦지 않은 이 시간에, 그리고 다음 정권에서 경제자유구역에 선택과 집중이라는 비료를 뿌려 시대정신이 잉태한 풍성한 과실을 후세대에게 물려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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