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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장과 켈리박사
입력2003-08-05 00:00:00
수정
2003.08.05 00:00:00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약 20여일이 흐른 지난 5월 22일. 런던의 한 호텔에선 향후 영국 전체를 뒤흔드는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라크내 대량살상무기(WMD)가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자 전쟁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은 BBC 방송의 국방담당 앤드루 길리건 기자와 걸프 전 이후 36번이나 이라크를 다녀오며 유엔 무기사찰단의 핵심 멤버로 일한 데이비드 켈리 박사가 마주 앉았던 것.
만남이 있은 후 일주일여가 지난 29일. 길리건 기자는 “총리실이 발표한 WMD 문서는 그럴싸하게 조작됐다”는 메가톤급 보도를 내보냈고, 사흘 후 “총리 공보수석이 `이리크는 45분만에 WMD를 쏠 수 있다`는 내용을 집어넣도록 조작했다”는 보도를 추가로 전파에 실었다.
영국 국방부는 즉각 켈리 박사를 취재원으로 지목했고, 켈리는 결국 청문회에 소환됐다. 청문회에서 그는 길리건 기자의 기사는 추론에서 나온 것 같다고 주장했지만, BBC는 끝내 자사 기사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청문회 의원들은 쓰레기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켈리 박사의 생의 의지를 점점 흐리게 만들었다.
켈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길리건과 첫 만남을 갖은 후 두 달이 채 못된 7월 18일.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왼쪽 동맥을 절단했다. 길리건 기자의 기사 가운데 일부는 켈리 박사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지금 영국 여론은 전쟁을 향한 토니 블레어 총리의 무모함, 국방부의 얄팍한 행동, 청문회 의원들의 자질부족, 언론의 특종 욕심 모두를 비난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 없이 각자의 정당성만을 고집하는 추악함을 드러냈다는 것이 그 비난의 근거다.
켈리는 자살하기 며칠 전 `모든 것이 해결되면 바그다드로 돌아가겠다`는 이메일을 친구에게 보낼 정도로 마지막까지 자기 업무에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그 말 많고 한 많은 WMD 존재 여부를 명확히 하는 것만이 켈리 박사에 대한 세상의 도리일 것이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한 이후 켈리의 죽음이 새삼 떠오른다.
<최윤석기자(국제부) yoep@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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