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미국 중앙은행이 경기호조와 고용시장 개선에도 임금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아 통화정책 운용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임금상승세가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자 영국 중앙은행(BOE)이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먼저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이라는 시장의 관측은 사그라지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초완화 통화정책 기조 종료시점을 정하는 데 보다 신중해질 것으로 보인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BOE는 13일(현지시간) 분기별 물가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올해 임금 상승률 전망치를 지난 5월 예상했던 2.5%에서 1.25%로 대폭 낮췄다. 이날 영국 통계청이 발표한 4~6월 평균 주급(보너스 제외)도 연율 기준으로 0.6% 오른 데 그쳐 BOE 사전 전망치인 0.9%를 밑돌았다.
마크 카니 BOE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임금상승이 매우 미미해 경제 취약성에 대한 불안감을 높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카니 총재는 "BOE 통화정책이사회(MPC)는 앞으로 특히 임금을 주목할 것"이라며 "기준금리 인상이 점진적이고 제한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부진한 임금과 달리 영국 경제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날 BOE는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종전의 3.4%에서 3.5%로 0.1%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내년 말 실업률 전망치도 5월에 내놓은 수치보다 0.5%포인트 낮은 5.4%로 제시했다. 올해 물가상승률도 BOE 목표치인 2%를 밑돌 것으로 내다봤다.
높은 성장세와 낮은 실업률, 안정된 물가수준 등 영국 경제지표가 전반적인 호조를 보이지만 BOE는 유독 부진한 임금상승률을 금리 결정의 가장 큰 변수로 보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마킷의 크리스 윌리엄슨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BOE가 임금상승률 전망치를 낮춘 것은 적어도 내년 초까지 금리가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며 "임금상승세가 확실해져야 BOE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CNBC도 당초 오는 11월로 예상됐던 영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내년으로 미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HSBC의 엘리자베스 마르틴스 이코노미스트는 "MPC 내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여전히 미미한 임금상승률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연내 금리가 인상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BOE 기준금리는 2009년 3월 이후 5년5개월째 사상 최저 수준인 0.5%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연준도 임금에 발이 묶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날 미 상무부는 7월 소매판매가 전달과 같은 수준에 그쳤다고 밝혔다. 이는 시장이 전망한 0.2%에 못 미친 것으로 6개월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국 경제의 약 70%를 차지하는 소비가 부진하다는 것은 경제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블룸버그는 소비부진의 주원인인 임금정체가 연준의 금리인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분석했다. 2·4분기 GDP 성장률이 4%에 달할 정도로 경기는 견실한 회복세를 보여왔지만 임금이 본격적으로 회복되지 않아 하반기 경기불안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7월 미국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전년 대비 2% 증가에 그쳤다. 컨설팅 회사 MFR의 조슈아 샤피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소비자들의 소비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먼저 임금이 올라야 한다"고 진단했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도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이후 기자회견에서 "임금상승률에 가속도가 붙지 않을 경우 가계소비의 하방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며 가계소비 확대를 위해 임금이 인상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채권왕'으로 알려진 빌 그로스는 최근 연준이 통화완화 정책 기조를 선회할 조건으로 임금상승률 3%를 제시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낙관론도 제기된다. 뉴욕 소재 TD증권의 밀란 멀레인 차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노동시장의 호조가 완연하다"며 "다른 지표들도 회복세를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몇 달 후면 소비가 눈에 띄게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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