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업이 '축소균형'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매출액 같은 외형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데다 순이익 증가율마저 사상 최저치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성장이 둔화되다 보니 과감한 선제적 투자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내수가 극히 부진한 가운데 그나마 우리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 주역들마저 체력이 고갈된 현상은 한국 경제에 드리워진 암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한국은행이 49만2,288개 기업을 전수조사해 16일 발표한 2013년 기업경영분석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2.1%로 한은이 관련 통계치를 내기 시작한 2002년 이래 가장 낮았다.
세부적으로 보면 제조업 위축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국내 경제를 떠받쳐온 제조업체의 매출 증가율은 지난해 0.5%로 1961년 이후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제조업 매출액 0%대 증가는 1998년 외환위기(0.7%) 당시를 제외하고는 없던 일이다.
대기업의 매출 증가율 둔화도 뚜렷했다. 지난해 대기업 매출액 증가율은 0.3%에 그쳐 2012년의 5%에서 급락했다. 비교 가능한 2007년 이후 최저치다. 중소기업은 5.6%를 기록해 2012년(5.3%)에 비해 다소 상승했다.
재훈 한은 기업통계팀 차장은 "수출 대기업 위주로 매출액 증가율이 크게 떨어졌다"며 "수출 물량은 늘었으나 원화 강세와 세계 경기 부진으로 수출가격이 하락한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채산성도 사상 최저치로 떨어졌다. 기업의 매출액 세전 순이익률은 지난해 2.9%로 역대 최저치이자 금융위기가 발발한 2008년과 같았다. 세전순이익률은 매출에서 원가와 이자비용 등을 모두 제외하고 세금을 내기 직전 남은 돈이 차지하는 비율을 뜻한다. 기업들이 지난해 1,000원어치 상품을 팔아 29원을 손에 쥐었다는 것이다. 이 수치는 △2010년 49원 △2011년 37원 △2012년 34원 등으로 3년 연속 쪼그라들고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기업들은 몸 사리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자기자본 대비 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을 뜻하는 부채비율은 지난해 141%로 2012년의 147.6%에서 하락했다. 부채비율은 2011년 152.7%를 찍은 후 3년 연속 하락하고 있다. 회사가 빌린 돈에 의존하는 비중을 뜻하는 차입금의존도도 지난해 31.5%로 2012년의 31.9%에서 하락했다. 차입금의존도는 차입금과 회사채 발행액을 총자본으로 나눠서 구한다. 기업은 자금을 빌려 적극적인 투자와 외형 확장에 나서야 하는데 이런 기능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축소균형에 빠진 우리 기업에 비해 일본 기업들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면서 위기감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과거 엔저 시기와 달리 최근 일본 기업들은 전기자동차, 리튬이온 배터리 등 차세대 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 기업들이 축소균형의 늪에 빠져 있는 반면 일본 기업들은 미래 신성장 동력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오세환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수석연구원도 "장기적으로 일본과 겹치는 정보기술(IT)이나 자동차 부문에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위협받을 수 있다"며 "최근 중국 등 신흥국들도 기술력을 많이 따라와 우리 기업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sed.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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