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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2월1일] 정성공, 대만 점령


1662년 2월1일, 대만 남단 질란디아(Zeelandia). 네덜란드 총독이 정성공(鄭成功)에게 고개를 숙였다. 멸망한 명(明)나라 군대가 대만에 상륙한 지 10개월 만이다. 38년에 걸친 네덜란드 식민시대도 이로써 끝났다. 정성공은 멸청복명(滅淸復明)을 도모했던 인물. 정복왕조인 청이 싫어 수많은 한족 지식인이 그를 따라 들어오며 대만은 중국화의 길을 걸었다. 정성공은 이듬해 말라리아에 걸려 39세의 한창 나이에 숨지고 대만도 21년 후 청에 굴복했지만 그는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쉰다. 대만에서는 국조(國祖)로,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영웅으로 숭상된다. 명의 망명 황실로부터 주(朱)씨 성을 하사받아 국성야(國姓爺)로 불리는 그는 서양에서도 ‘콕싱가(Koxinga)’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 정성공을 따라 이주했던 본성인(本省人)과 국민당을 쫓아 들어온 외성인(外省人)간 갈등의 뿌리가 이미 345년 전에 싹텄다. 대만은 정성공 일가를 ‘정씨왕조’로 부르며 독립의 상징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중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시위와 평화공세도 청나라의 정씨정권에 대한 강온양면책과 맥락을 같이 한다. 식민지배를 당했음에도 호감도 1위 국가로 일본을 지목하는 대만인 의식구조의 바탕에도 정성공이 있다. 정성공이 반쪽 일본인이기 때문이다. 중국 해적과 일본인 하급무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고향인 나가사키에서 일곱살까지 ‘후쿠마쓰(福松)’로 살았다. 중국 견제용으로 일본과 준군사동맹을 추구하는 대만의 모습은 청에 맞서 일본 막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한 정성공의 복사판이다. 중일 혼혈로 양쪽에서 추앙받는 정성공의 존재는 중국과 대만ㆍ일본의 앞날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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