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세대 삶의 질 결정짓는 요인… 능력보다 부모 자산 등 영향 더 커"
수많은 연구 통해 '사실'로 입증
신분상승 동력 교육도 불평등 심화… 개천서 용 난다·자수성가 옛말로
요즘 '수저계급론'이 유행이다. 은식기를 즐기던 옛 유럽귀족의 생활상에서 유래한 '은수저(silver spoon)를 물고 태어나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우리네 가난하던 시절에 자주 쓰이던 '자식이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는 말은 어떻게든 제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며 개인의 능력에 힘을 실어준 것과 달리 '은수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富)가 삶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의미다. 자산 20억원 이상이거나 2억원 넘는 연봉이라야 '금수저', 자산 10억 원에 연 수입 8,000만 원 이상이면 '은수저' 식으로 '수저 계급표'도 회자된다. 우스개 같던 불편한 '수저계급론'에 흙 묻은 수저를 뜻하는 '흙수저'가 등장하면서 우울한 자조적 공감은 더욱 확산됐다. '흙수저' 계급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기는커녕 부모 봉양의 부담을 안고 살아야 하며, 취업·결혼·내 집 마련 등 삶의 요소를 모두 포기하는 'N포 세대'와 겹쳐진다. 결국 자수성가는 옛말이요,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전설이 되었으며 신분 상승의 사다리는 폐기처분 된 현실에서 개인의 능력보다는 세습된 요소들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얘기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는 한국 사회에서 허상인가. 꿈,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는 곳,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생각나는 미국도 사실 능력주의와는 먼 나라라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능력주의란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비례해 보상을 해주는 사회 시스템을 뜻한다. 능력은 개인이 갖는 특성이지만 능력주의는 사회가 갖고 있는 특징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쓴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출현'에서 처음 사용된 신조어로, 차별적 특혜 없이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능력주의의 논리는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실은 딴판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사회학과 교수인 저자들은 개인의 타고난 능력, 근면성실함, 도덕성 등 능력적 요인보다 계층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 대물림되는 특권과 특혜 등 '비능력적 요인'이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수많은 연구를 통해 사실로 입증해 보인다. 잔인할 정도다. 인생에서 펼치는 경쟁을 경주에 비유한다면, 이 경주는 세대가 바뀔 때마다 새 판을 짜서 새로운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부모로부터 출발점을 물려받는 '릴레이 경주'에 가깝다는 것이 저자들의 분석이다.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배턴(baton)이 전달된 후에도 부모와 자녀는 한동안 함께 달린다. 그러니 처음부터 결승점에서 출발하는 '금수저'가 있는가 하면 한참 뒤에서 돌부리까지 치우고 나서야 출발하는 '흙수저'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출발점을 결승점 가까이 옮겨놓는 상속에는 유형의 재산뿐만아니라 특권과 특혜와 같은 무형의 자산도 포함된다. 우선 부모가 속한 계층에 따라 교육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교육이 성공의 열쇠이며 능력주의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게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 "양질의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차별적으로 주어져 교육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철저히 비능력적 요인이 된다"고 책은 말한다. 여기다 인맥을 뜻하는 '사회적 자본'과 취향·생활양식·학위·스타일 등 영향력 있는 사회집단의 소수만이 알고 있는 일련의 '문화적 자본'까지 세습되는 무형의 자본은 다양하고 계층 간 벽은 더 공고해진다.
해법은 없을까? 저자들은 이런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권력자의 강인한 의지가 필요하고, 부유층에게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도록 경제 제도와 정치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분명하고 옳은 말이지만 실현되기란 마치 흙수저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 만큼이나 멀게만 보여 원망스럽다. 1만5,500원.
/조상인기자 ccs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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