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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산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 현장인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전시실 정문에 적혀 있는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싸고 혼란에 휩싸여 있지만 비단 이는 역사 문제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모든 일을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라는 말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오는 18일은 국민안전처가 부처 출범 1년을 맞는 날이다. 안전처는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움과 반성 그리고 새 희망 속에서 '안전 컨트롤타워'라는 구호 아래 소방, 해경, 안전 관련 행정부서가 합쳐져 탄생한 곳이다. 지난 1년을 돌아볼 때 안전정책과 관련해 안전처에 과연 점수를 얼마나 줄 수 있을까. 그동안 벌어진 각종 재난 사고는 제쳐놓더라도 출범 초기 장엄했던 안전 초심(初心)은 365일도 안돼 흐릿해져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지난해 눈만 뜨면 부르짖던 안전이 최근에는 정치적 흥정거리로 전락해버린 점이 대표적이다. 특정 지역 표를 의식해 안전처의 세종시 이전 시기를 내년 총선 한 달 전으로 서둘러 못 박아버린 것은 한마디로 정부의 '안전에 대한 배신' 이다. 1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버젓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 것이다.
물론 부처 이전 문제는 사실상 안전처에 결정권이 없다는 점에서 정치의 문제로 돌려세우더라도 안전처 내부를 보면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안전처의 국가직 소방공무원 327명 가운데 51%가 최근 1년 안에 승진했다. 거대한 새 조직이 생기면서 자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전처 고위 공무원의 처신은 실망 자체였다.
지난달에는 소방장비 납품계약 감사와 관련해 1급을 포함한 고위 소방공무원 3명이 한꺼번에 직위해제됐다. 앞서 지난 9월에는 배우자의 부적절한 취업 의혹으로 안전처 1급 간부는 3개월의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승진잔치'라는 말을 거북스러워한다면 지위에 맞게 더욱 몸을 낮췄어야 했지만 이를 망각한 결과가 불러온 참사다.
올해 한국 사회를 뒤흔든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서도 안전처의 역할이 실종됐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또 다급히 생긴 부처라는 점에서 안전처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고 역할도 불분명한 조직이 상존한다. 그나마 올해 상반기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이라는 청사진을 마련해 장기적 안전대책을 마련한 것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최근 처음 공개한 지역안전지수 발표 과정에서는 지자체의 눈치를 보는 듯 공개 범위를 등급으로 한정하고 우수 지역만을 솎아 공표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안전, 이 두 글자를 위해서라면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것 같던 1년 전 안전처의 의지와 기대는 갈수록 깊은 바닷속으로 잠기는 모양새다.
안전처는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넋으로 만들어진 부처다. 설령 다른 부처들이 세월호의 흔적을 빨리 지우고 싶어 하더라도 단 한 곳, 안전처만은 그러면 안 된다. 그것이 구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의무다. 부처 출범 1년을 맞아 자화자찬식 또는 장밋빛 미래만 늘어놓는 돌잔치에 앞서 세월호 사고 현장에 들러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초심을 다질 만한 안전처 간부가 단 한 명이라도 있을지 의문이다. 한영일 사회부 차장 hanul@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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