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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9시에 조금 못 미친 시각 국회. 정의화 국회의장의 출근길에 진을 친 기자들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요건을 갖추긴 한 거냐"라고 묻자 정 의장은 "음….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부터 국회는 바쁘게 돌아갔다. 전날 여야 지도부가 심야까지 협상을 벌이고도 합의하지 못한 테러방지법을 정 의장이 이날 직권상정하겠다고 밝힌 셈이기 때문이다.
야당은 전날 국가정보원에 도·감청 권한과 금융 계좌 등에 대한 정보수집권을 주자는 새누리당 안에 끝까지 반대했다.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면서도 개입해온 국정원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다.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상정 요건은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또는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한 경우로 제한된다. 정 의장은 최근의 안보정국을 전시·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판단했다.
이로부터 2시간 뒤인 오전11시께. 정 의장이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 의장이 정한 심사기일은 이날 오후1시30분. 이 시간 이후로는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본회의를 개최해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긴급 소집된 더민주 의원총회에서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 의장이 국회법의 정신을 깡그리 무시하고 청와대의 사주와 압력에 못 이겨 초법적인 직권상정을 시도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국정원이 테러라는 명분으로 전국민에게 통신감청을 하는 '빅 브러더스'가 되는 '국정원 국가'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규탄했다.
제2 야당인 국민의당도 직권상정에는 반대했다. 문병호 의원은 의원총회에서 "테러방지법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내용이 졸속·부실한 상태에서 직권상정할 순 없다"며 “국민의 기본권을 상당히 제한하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이렇게 중대한 내용을 심의도 안 하고 졸속으로 통과시킬 수 있느냐"고 말했다.
더민주는 새누리당의 단독 본회의를 "온몸을 던져 막겠다"고 결의하고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요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런 가운데 오후7시께 새누리당 주도로 본회의가 열렸고 더민주는 김광진 의원을 첫 주자로 하는 필리버스터로 맞섰다. 야당의 무제한 토론이 시작되자 여당의 상당수 의원들이 퇴장했다. 이날 필리버스터는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첫 사례로 기록됐다. /맹준호기자 next@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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