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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그리고 주식 … 이리 전쟁





‘이리 전쟁(the Erie war of 1868)’. 진짜 전쟁은 아니고 철도회사의 경영권 분쟁이지만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만큼 치열했다. 1868년 봄 미국 정가를 달궜던 앤드류 존슨 대통령 탄핵 재판보다 더 많이 신문지상에 올랐다고 한다. 앤드류 존슨이 누구인가. 암살 당한 링컨의 대통령직을 승계한 그는 빌 클린턴과 더불어 미국의 역대 대통령 44명 중에서 유이(唯二)하게 탄핵 소추 당했던 인물.

정가를 뜨겁게 달군 대통령 탄핵보다 철도회사 경영권 다툼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흥행요소를 고루 갖췄기 때문이다. 우선 등장인물이 화려했다. 코넬리우스 밴더빌트, 대니얼 드류와 제이 굴드, 짐 피스크1. 하나 같이 미국을 대표하는 대부호들이 주식을 둘러싸고 ‘총 균 쇠’2의 전쟁을 펼쳤으니 흥미로울 수 밖에.

싸움의 서곡은 운임 경쟁에서 울렸다. 밴더빌트는 연안 여객선을 운항하던 시절부터 운임을 내려 경쟁자를 주저앉히는 수법을 철도에서도 써먹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센트럴 철도가 경쟁노선인 이리 철도를 누르기 위해 버팔로-뉴욕 구간의 운임을 125달러에서 100달러로 내렸다. 이리 철도의 다니엘 드류가 75달러로 맞받아치면서 경쟁은 불이 붙었다.

칠순 나이의 밴더빌트와 드류의 끝없는 인하 경쟁은 운임이 1달러까지 떨어졌을 때야 멈췄다. 밴더빌트는 승리했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가축 중개상 출신인 드류는 소를 사들여 밴더빌트의 화차에 실어 운임 인하의 혜택을 고스란히 챙겨갔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밴더빌트는 분노에 떨면서 드류가 장악한 이리철도를 빼앗기로 마음먹었다. 쇠(돈)로 쇠(철도)를 노린 것이다.

6개월간 비밀리에 진행되던 주식 매집 작전으로 위기를 느낀 드류는 ‘물타기’에 나섰다. 남몰래 주식을 발행한 것. 물타기는 드류의 주특기였다. 목축업자 시절부터 물타기에는 이골이 났다. 냉동열차가 없던 시절, 장거리 이동에 지친 소 떼가 도시에 도착하기 직전 무렵 소들에게 강제로 소금을 먹여 미친 듯이 물을 들이켜게 만들어 몸무게를 늘리는 꼼수로 돈을 벌었던 드류는 주식에서도 물타기수법을 써먹었다.

밴더빌트의 주식 사재기가 공개된 1868년 3월 10일, 이리 철도의 주가가 급상승하는 가운데 드류 일당은 밤새 인쇄기를 돌려 700만 달러 어치를 신주를 찍어냈다. 거대한 규모의 불법 신주 발행은 부패한 법원이 도와줬다. 드류는 판사를 매수해 적법한 행위로 인정받았다.

밴더빌트는 불법 발행된 신주를 하루에 700만 달러 어치나 사들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다음날 새벽 잠자고 있는 판사를 깨워 드류 일당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 받았다. 벤더빌트에게도 쇠(돈)로 배양한 바이러스(판사)가 있었던 것이다. 드류 일당은 체포 당하기 직전, 돈과 주식을 챙겨 들고 허드슨 강을 건넜다. 뉴욕 법 효력이 미치지 않는 뉴저지에 내리자마자 드류 일당은 경찰과 법원에 5만 달러의 뇌물을 뿌려 뉴욕주와 공조 수사를 막았다.

거대 도시 뉴욕에 밀려 지내던 뉴저지 주의회는 기회다 싶었는지 뇌물을 받고 드류 일당을 옹호하는 법률을 만들어 이리철도의 경영권 분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싸움은 밴더빌트가 뉴저지 의회와 법원, 경찰에 대규모 뇌물 공세를 시작할 무렵에야 휴전으로 끝났다. 드류 진영에서는 약간의 변화도 있었다. 드류의 수족으로 일하던 굴드와 피스크가 스승을 밀어내고 주류로 올라선 것이다. 염증을 느낀 밴더빌트는 이리 철도에서 한 발 물러나 승리는 굴드와 피스크에게 돌아갔다.

148년전 월가의 봄을 달궜던 이리철도 주식 매집 전쟁은 ‘제도’를 남겼다. 존 스틸 고든의 명저 ‘월스트리트 제국’에 따르면 기업들이 주식발행 일정을 사전 공표하는 제도가 이때 만들어졌다. 또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업 인수 합병(M&A)의 풍토가 싹텄다. 19세기 미국 거부들의 일생을 다룬 책자 ‘신화가 된 기업가들 - 타이쿤’을 쓴 찰스 모리스에 따르면 드류와 굴드 등의 도발은 기업가의 의욕을 불러 일으켜 미국 전역에 철도가 빠르게 퍼지는 게 일조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행도 마다하지 않던 19세기 미국 기업인들의 습성을 사라졌을까. 피도 눈물도 없는 인수 합병과 차익만 빼먹고 먹튀하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1. 끝까지 살아남았던 제이 굴드는 ‘월가의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랜트 대통령까지 작전에 활용한 금투기로 1873년 공황을 야기한 주범으로 지목받았기 때문이다. 짐 피스크는 미망인을 둘러싼 삼각관계 때문에 총 맞아 죽었다. 이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다른 두 사람은 아직도 이름이 살아 있다. 돈벌이에는 악명을 떨쳤으나 유별난 신앙심을 지녔었다는 다니엘 드류의 이름은 뉴저지 소재 드류대학교에 내려져 온다.(원래 신학교였으나 드류의 기부로 땅과 건물을 늘린 끝에 드류 사망 21년 후인 1900년 이름을 드류대학으로 바꿨다)

다른 세 사람에 비해 선이 굵고 꼼수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던 밴더빌트의 명성도 밴더빌트 대학교에 이름이 살아있다. 1973년 밴더빌트의 후손 120명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 백만장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부는 5대만에 사라졌어도 그의 이름은 밴더빌트 대학교를 통해 유구하게 전해지고 있다. 밴더빌트 가문의 기부금 100만 달러를 받은 샌트럴 대학이 교명을 바꾼 대학이 밴더빌트 대학교다.

밴더빌트의 증손녀 콘수엘로 밴더빌트. 말보로 공작부인


밴더빌트와 굴드의 공통점도 있다. 가문을 빛내 줄 혈통을 구해 유럽 귀족들과 혼맥을 맺었다는 점이다. 밴더빌트의 증손녀인 콘수엘로 밴더빌트는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구애하는 미국 청년들이 많았으나 집안의 강요로 9대 말보로 공작인 찰스 스펜서 처칠에게 지참금을 왕창 싸들고 시집갔다. 찰스 처칠은 윈스턴 처칠의 사촌 형으로 미국 부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뒤 살림이 펴진 삼촌을 본받아 밴더빌트 가문을 골랐다. 정작 결혼 생활은 찰스의 바람끼로 행복하지 못했다. 결혼 25년만에 이혼한 콘수엘로는 조종사 출신 프랑스인과 결혼,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찰스 처칠은 이혼 후 또 다른 미국 부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재산을 불렸다.

굴드의 막내 딸 안나 굴드의 결혼 생활은 더 불행했다. 프랑스의 보스파니 백작과 1895년(밴더빌트와 처칠 가문도 이 해에 혼맥을 맺었다) 결혼한 안나는 남편의 바람끼에 편할 날이 없었다. 보스파니 백작은 아내의 지참금으로 선원 90명이 딸린 1,600톤 급 짜리 요트를 구입하고는 날마다 파티를 열어 다른 여자들을 끌어들였다. 안나는 신혼 7년 동안 아이 5명을 낳아 바깥에서는 금슬 좋은 부부로 알려졌으나 실은 ‘작고 못생긴데다 걸핏하면 토라지는 안나’의 임신 기간 동안 마음 놓고 다른 여자를 만나려는 보스파니 백작의 술책이었다고 한다. 남편의 끝없는 외도와 낭비벽에 질린 안나는 결혼 11년 만에 이혼하고 보스파니의 사촌인 헬리 공작과 재혼한 뒤에도 돈이 떨어진 전남편으로부터 여섯 차례의 이혼 및 재혼 무효소송에 시달렸다.

2. 본문에서는 빠진 총 이야기. 이리철도의 경영권을 쥔 굴드는 이익을 위해 어떤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리철도 매집이 공개된 시점으로부터 1년 5개월 뒤인 1869년 여름, 굴드와 피스크는 뉴욕주 남부의 도시 빙햄턴 근교에서 소형철도회사 A&S측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운행노선이 230㎞에 불과하고 수익도 못 올렸으나 선로 주변에서 양질의 석탄광이 발견된 A&S를 완력으로 빼앗기 위해서다.

주식 매집을 통해 경영권 확보가 어려워지자 피스크는 깡패 800명을 모아 열차에 태우고 A&S본사로 쳐들어갔다. A&S사 역시 폭력배 450명을 열차에 태워 피스크 진영으로 내보냈다. 단선철도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온 열차들은 저속이나 정면 충돌했다. 이어진 총격전에서 11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쳤다. 뉴욕주지사가 군대를 동원한 다음에야 멈춘 실제 총격전에서 수는 적었어도 권총과 장총이 많았던 A&S사가 우세했다. A&S사의 철도 노선을 차리하려는 최종 승리는 중재를 맡았던 모건 은행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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