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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가문 결혼 대박 사건…혈통과 돈의 만남





걷다 지치면 말 타고 싶고, 말 타면 시종 부리고 싶은 게 인간의 속성. 서양이라고 다를까. 영어엔 이런 말도 있다. ‘Greed has no limit(탐욕은 끝이 없다).’ 레너드 제롬(1817~1891)이 바로 끝없는 탐욕의 전형. 신교도로 개종한 유대인으로 종교 탄압을 피해 미국에 이주한 위그노(프랑스 신교도)의 후손인 그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부유한 농장주인 아버지 덕에 법학(유니온 대학)을 전공하고 바로 뛰어든 곳이 월 스트리트. 당시 최고의 블루칩(핵심 우량주)이던 철도 주식을 집중 투자한 그는 ‘매도 시점의 귀재’로 불렸다. 싼 주식을 사들이고 주가가 올랐다 싶으면 헛소문을 퍼트려 주식을 팔았다. 떨어진 주식은 또 다시 사들이고 비싸게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긁어 모은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돈보다 더 귀중한 가치’를 찾기로.

명성을 의식한 그는 여느 투기꾼과는 달리 ‘무지막지한 작전’은 자제해 점잖은 투기꾼이라는 평도 얻었다. 보다 갈망했던 것은 사회적 신분 상승. 뉴욕 타임스 주식을 사들여 언론사 대주주로 뻐기고 요트와 경마 같은 고급 취미에도 눈 돌렸다. 미국 요트협회와 경마협회를 만든 것도 레너드다.

돈도 마음껏 썼다. 비싸디 비싼 뉴욕의 땅을 매입해 개인 전용 경마장을 짓고, 파티를 열어 상류계급 여성들의 손목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를 끼워줬다. 부를 있는 대로 과시하던 부자놀음의 결정판은 결혼. 미인으로 소문난 둘째 딸 제니 제롬을 ‘고귀한 신분’과 맺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마침 유럽에는 몰락한 귀족들이 많았던 상황. 땅은 많았어도 산업자본가로 변신하거나 무역이나 공장에 투자하지 못한 귀족들의 생활은 쪼들렸다. 남은 토지에서는 소작인들이 도시로 떠나는 데다 소출마저도 해외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에 밀렸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귀족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위로 생각하던 그들도 기회를 찾았다. 미국 졸부들의 딸이 싸들고 오는 결혼 지참금.

결혼 직전의 제니 제롬. 미국 갑부와 유럽 귀족간 결혼의 물꼬를 튼 제니는 ‘오리지널 달러 공주’로 불렸다.


미국 투기꾼의 딸인 제니와 랜돌프 처칠이 바로 이렇게 만났다. 랜돌프는 영국 최고의 명문가문인 처칠 공작가문*의 8대손이지만 둘째 아들이어서 공작 작위도 영지도 상속받지 못하던 청년.** 외교부에 근무하던 26살 청년 랜돌프는 여섯 살 어린 제니와 파리의 요트 클럽에서 만나 바로 사랑에 빠졌다. 우연을 가장했으나 고도로 기획된 만남은 8개월 뒤 결혼으로 이어졌다. 레너드는 딸 제니에게 5만 파운드의 지참금을 딸려보냈다.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랜돌프와 제니의 결혼은 유행을 낳았다. 돈은 많아도 ‘고귀한 혈통’과 거리가 먼 미국 졸부의 딸들이 유럽 귀족가문에 잇따라 시집오고 ‘달러 공주(dollar princess)’라는 용어가 생겼다. ***

‘오리지널 달러 공주’라고 불리던 처칠 부인 제시는 타고난 미모를 무기로 런던 사교계를 주름잡았다. 랜돌프가 37세에 하원의장 겸 재무장관에 오른 것도 내조 덕이다. 숱한 염문을 뿌렸던 제시의 애인 명단에는 국왕 에드워드 7세까지 포함돼 있었다. 정치 생명을 건 모험에 실패한 랜돌프가 매독 합병증으로 사망(45세)한 뒤 제시는 스무살 연하의 근위대 대위와 재혼해 화제를 뿌렸다. 재혼 14년 만에 이혼하고 63세 때 40세 남편을 맞아들이면서도 귀족 신분을 말해주는 ‘레이디 랜돌프’라는 호칭은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 왕실 소유가 아닌 유일한 ‘궁전’ 블래넘 궁전. 처칠 가문의 시조인 존 처칠이 하사받았다.




제시가 랜돌프와 결혼 7개월 반 만에 낳은 첫째 아들은 두 번째 남편과 동갑이었다. 세 번째 남편보다는 세 살 많았던 첫째의 이름은 윈스턴 처칠. 2차 대전에서 영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제 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윈스턴 처칠이 바로 돈과 혈통의 결혼이 빚어낸 산물이었으니 결과가 대박이었던 셈이다. ****

처칠 가문은 미국인 졸부의 딸과 결혼의 꿀맛을 잊지 못했는지 또 다시 미국인 규수를 맞아들였다. 이번에는 보다 규모가 컸다. 가문의 적장자인 9대 말보로 공작 찰스 스펜서 처칠은 왕족이 아닌 귀족으로는 영국에서 유일한 블래넘 궁전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지자 숙부를 따랐다. 상대방은 미국 최고 갑부 집안인 밴더빌트 가문의 콘수엘로 밴더빌트. 뉴욕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던 그녀는 미국인 애인을 포기할 수 없다며 버텼으나 감금 당하고 어머니가 단식에 들어가자 혼인을 받아들였다.

9대 말보로 공작 스팬서 처칠 가족. 밴더빌트 가문은 사상 최고의 지참금으로 처칠가와 혼맥을 맺었다.


숙부보다 수십 배의 지참금을 받아 궁전을 단장하고 살림살이는 펴졌지만 둘 사이는 행복하지 않았다. 9대 말보로 공작의 바람기 탓이다. 남편의 외도에 지친 콘수엘로는 결혼 25년 만에 이혼하고 프랑스 출신의 조종사가 재혼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다. 찰스 스펜서 처칠 공작은 이혼 뒤에 또 다시 미국인 졸부의 딸과 결혼해 재산을 불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돈과 혈통의 결혼’은 그 다지 많은 것 같지 않다. 고귀한 혈통이 없는 탓인지, 돈이 곧 신분이며 그 위력 앞에 모든 것이 함몰되는 사회라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처칠 가문을 일으킨 존 처칠은 영국 육군사에서 손꼽히는 명장. 그저 부유한 시민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 작위 중에 최고인 공작(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순) 작위는 물론 왕실 이외의 가문으로는 유일하게 ‘궁전’(블래넘 궁전)까지 하사 받았다. 말보로 공작가문의 시조인 존의 성공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등에서의 무훈 덕이지만 아내 사라 처칠의 내조도 한 몫 거들었다. 사라는 앤 여왕의 시녀(영국에서는 귀족이 시녀나 시종을 맡았다)이자 친구라는 점을 이용해 남편의 출세를 도왔다. 투기꾼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1720년 영국을 뒤흔든 남해회사 버블 사건(주가의 거품을 뜻하는 ‘bubble’이라는 용어가 이때 처음 쓰였다)에서 ‘로빈슨 크루소 여행기’를 지은 다니엘 디포는 쪽박을 차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던 뉴턴도 우리 돈으로 20억원 이상을 날렸지만 사라 처칠은 고급 정보를 이용해 100억원이 넘는 시세 차익을 남겼다.

** 영국은 장자만 작위를 승작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아버지가 백작이면 모든 아들이 백작 작위를 받았다. 결국 세금을 내지 않는 귀족 계급이 넘쳐나 재정이 궁핍해지고 종국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 유럽 귀족의 자제와 결혼하려는 미국인 규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유럽을 취재한 미국 신문 특파원은 “함부르크에서만 100명이 넘는 미국인 처녀들이 신랑감을 찾고 있다”는 기사를 보냈다. 관련 책자도 무수히 나왔다. ‘영국 귀족과 결혼하는 법’에서 ‘미국인 공주들’ 등등.

**** 9대조 할머니인 사라 처칠이 영국의 정치와 경제를 막후에서 주름잡았던 투기꾼이며 외활아버지인 레너드 제롬은 월가를 대표하는 투기꾼이었으나 윈스턴에게 주식투자의 재능은 유전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18세기 영국과 19세기 미국 작전세력의 피를 물려받은 윈스턴 처칠은 재무 장관을 막 마친 1929년 9월, 미국을 방문해 각종 강연료로 받은 2만달러를 뉴욕증시에 투자해 날렸다. 세계대공황 직전 끝물을 탄 것. 깡통 차지 않은 게 다행이다. 처칠은 손실을 바로 만회했다. 자력이 아니라 친구 버나드 바루크의 도움에 의해서다. 윌슨에서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40년간 대통령 경제보좌관을 지낸 그는 ‘윈스턴 처칠’이라는 계좌를 미리 만들어 처칠이 사면 팔고, 팔면 사는 정반대의 투자로 수익을 남겨 처칠에게 넘겼다. 요즘 기준으로는 ‘뇌물 공여죄’에 해당되는 의리를 보여준 버나드는 ‘냉전(Cold War)’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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