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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위기의 데자뷔, 1873년 공황





대공황. 1929년 10월 월가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1930년대 경기 침체를 일컫는 말로 굳어졌으나 원조는 따로 있다. 1873년의 공황이 바로 그 것. 1930년대를 강타한 대공황 이전까지 ‘대공황’이라고 하면 1873년 공황을 의미했다. 무엇을 대공황으로 분류할지는 1930년대 중반께부터 정리됐다. 먼저 ‘대공황’은 1930년대 공황을 지칭하고 1873년의 공황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장기공황(the Long Depression).’

경기침체가 길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경기침체 여부를 판단하는 데 가장 권위 있다는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측정한 1873년 불황의 지속 기간은 65개월. 불황에서 벗어나는 데 114~176개월이 걸렸다는 시각도 있다. 어떤 경우든 대공황의 43개월보다 길다. 영국 경제는 무려 23년을 침체에 허덕였다. 1873년 공황을 더욱 주목해야 할 이유도 있다.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와 닮은꼴이라는 분석 때문이다.

1873년 장기공황의 성격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대공황보다 심각했다’는 평가 반대편에 ‘생산과 소비가 성장했기에 공황에 끼지도 못한다’는 시각이 상존한다. 무엇이 옳은지를 떠나 확실한 사실은 순식간에 세계로 전이됐다는 점이다. 중부 유럽의 한 점(點)에서 시작해 세계라는 여러 줄의 선(線)으로 퍼졌다. 시발점은 1873년 5월9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 빈에서 발생한 주가 대폭락.

철도 건설에 과도한 투자와 부실 대출 우려 탓으로 철도·금융관련주가 급락하더니 거래소가 문을 닫았다. 음악과 예술의 수도 빈에서는 거대한 탄식이 일었다. 마침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개최(1873년 5월) 된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국운이 융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성장 동력을 잃었다. 빈 주식거래소가 이전 모습을 찾기까지 10년 동안 상장회사의 90%가 사라졌다.

빈에서 시작된 주가 폭락은 과잉 유동성과 공급 과잉, 난개발·중복 투자의 복합 산물.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프랑스는 배상금 5억 프랑을 내주며 경제가 휘청거린 반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국가들은 더더욱 철도 건설에 매달렸다. 공급도 넘쳤다. 후발산업국 독일과 미국이 쏟아내는 공산품이 쌓이는 데 수요는 프랑스 경제 위축 등의 영향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빈에서 촉발된 위기는 국경과 해협, 대양을 넘었다. 마침 영국과 미국 등이 철도 버블을 안고 있어 타격이 컸다. 미국이 특히 어려웠다. 금융통화 정책 잘못 탓이다.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받은 전쟁 배상금을 재원으로 1871년 은화 주조를 중단하고 금본위제도를 채택하자 미국인들은 몸이 달았다. 은(銀) 가치의 추가 하락을 걱정하던 미국은 1873년 4월 화폐주조법을 발표하며 금·은 복본위제도에서 은을 뺐다. 은 가격은 더욱 내려가고 미국의 통화공급도 줄었다. 이자율은 뛰어 농부와 채무자들은 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황이 갑자기 도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1869년 증시침체와 1871년 시카고 대화재, 1872년 말(馬) 인플루엔자까지 도는 등 불안 심리가 널리 퍼져 있던 상황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월 가의 큰 손, 제이 쿡(Jay Cooke)의 은행이 1873년 9월 도산한 것이다. ‘제이 쿡 은행 도산’ 기사가 실린 신문을 팔던 소년이 ‘유언비어 살포’ 혐의로 현지 경찰에 체포될 만큼 안전한 은행의 대명사였던 제이 쿡 은행의 도산은 미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 철도 관련 기업들의 타격이 컸다.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6년부터 장기공황 직전까지 총연장 9만㎞의 철도를 건설하며 ‘미래를 보장하는 블루칩’으로 대우받았던 철도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불황이 시작된지 단 2년 만에 364개 철도회사 가운데 89개사가 부도나고 1만 8,000여개 사업이 실패해 쪽박을 찼다. 실업률은 14%까지 치솟았다.



살기가 팍팍해지는 가운데 이득을 본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부호들은 사업을 확대 개편할 기회로 여기고 무한 경쟁에 뛰어드는 한편 덩치 불리기에 나섰다. 불황의 와중에서 거대 독점기업과 노동조합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다. 앤드류 카네기, 존 록펠러, J.P 모건 같은 자본가들은 불황의 시기에 생존을 위해 기업을 사들이거나 합종연횡하는 방법으로 독점 구조를 만들었다.

독일은 공황을 맞아 사회주의 사상이 퍼질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연금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들을 진정시켰다. 경제난 속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반유대인 감정이 깊어지고 러시아와 동유럽,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대인 박해(pogrom)가 더욱 심해졌다. 어느 국가보다 타격받은 나라는 영국. 1896년까지 23년간 장기침체에 빠졌으면서도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진이 빠지고 말았다.

산업경쟁력 우위를 자신하던 영국은 공황을 맞은 주요국들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관세를 올리는 동안에도 자유무역 정책을 고수하고 오히려 자본수출을 늘려 결과적으로 경쟁국들을 도왔다. 자본이익률이 떨어지는 영국을 빠져나온 자금은 미국과 독일에 투자돼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후발주자들의 추격으로 선진국 수출시장에 대한 영국 상품의 점유율이 떨어지자 영국은 속국이나 다른 변경국가로 수출선을 돌려 규모는 이어나갔으나 속으로부터 병들어갔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경험한 전 지구적인 장기 불황은 최초의 장기적이고 세계적인 전쟁을 낳았다. 불황의 타개책을 대외팽창에서 찾은 유럽과 미국은 식민지 경쟁을 펼쳐 새로운 시장을 열고 경제 회생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으나 결국은 전쟁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떠오르던 독일과 지는 해인 영국 간 식민지 쟁탈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작금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대공황보다는 장기공황과 닮은꼴이라는 점. 버블이 그렇고 단일자본주의 체제라는 점이 그렇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 시립대 교수는 ‘현대 경제사에서 대공황으로 분류할 수 있는 위기는 1857년과 1929년 두 번뿐’이라며 ‘제3의 대공황에 대비하라’고 경고한다. 일본의 경제 관료 출신인 ‘미스터 엔’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사카키바라 야오야마 카쿠인대 교수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금융부실과 과도한 신용으로 시작됐다는 점에서 지금과 1873년 장기공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려운데 얼마나 더 긴 터널을 지나야 할지 아득하다. 한 가지 위안은 생존할만한 기업이나 국가는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무수히 많은 기업이 사라졌어도 IBM이나 GE 등과 같이 장기공황 시기에 태동해 살아남은 세계적 기업도 적지 않다. 청바지 업체인 리바이스도 1837년 대공황과 생일이 같다.

크루그먼의 경고가 현실화한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의 좌표는 어디쯤 있을까. 세계의 무역규모가 줄어드는 가운데 선진국에 대한 수출 경쟁력보다 중국 특수라는 요인에 매달리는 구조가 179년 전 영국과 비슷해 보인다. 당시의 어려움을 독일과 미국은 2차 산업혁명, 즉 전기와 철강 분야의 기술 혁신으로 넘었다. 한국 경제에 그런 극복 요소가 있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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