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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배신과 왜곡, 승리... 세포이 항쟁





1857년 5월10일, 인도 북부 메루트시. 영국 동인도회사의 식민지군에 소속된 인도인 병사(Sepoy)들이 총을 들었다. 저항의 도화선은 신형 소총. 화약과 탄알을 따로 장전하는 구식 소총 대신 화약·탄알 일체형 탄약을 사용하는 ‘1853년식 엔필드 소총’을 세포이들이 꺼렸다. 소나 돼지기름을 묻힌 탄약포가 문제였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도 세포이들은 동물의 기름이 묻은 탄약포를 입으로 물어뜯어 탄약을 꺼낸 뒤 장전해야 한다는 점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였다. 종교적 금기를 입과 맞추게 한 처사가 기독교로 개종을 유도하기 위한 술수라고 여겼기 때문. 가뜩이나 연간 400만 파운드씩 짜내던 영국의 경제 침탈로 불만이 높아진 상황. 세포이 병사들이 종교적 이유로 총기 수령과 사격 훈련을 거부하자 영국인 장교들은 군법회의를 열어 주동자들을 감옥에 보냈다. 징역 10년형.

세포이들은 여기에 분노했다. 메루트시에 주둔한 동인도회사 식민지군 3개 연대에 소속된 2,357명은 영국인 장교들을 죽이고 옥을 부숴 동료들을 구출해냈다. 세포이 병사들의 봉기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인도 전역에 퍼진 세포이 총병력 23만 8,000명 가운데 10만여명이 영국의 침탈에 항거하자 농부와 자영업자, 소규모 상공업자들이 따라 붙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사례가 잇따랐다.

세포이를 주축으로 하는 인도인 군대는 델리로 진격해 영국에게 폐위된 무굴 제국 황제를 옹립하며 인도 독립의 기치를 올렸다. 영국은 몸서리쳤다.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인도 침탈에 나서지 꼭 100년. * 크고 작은 저항이 있었어도 특유의 ‘분열을 유도하고 통치하는 방식(divide & rule)’으로 위기를 넘기며 인도의 지배권을 굳혀가던 터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니 충격이 컸다. **

세포이 항쟁으로 인도는 곧 독립을 회복할 것 같았으나 결과는 정반대. 세포이 항쟁은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의 신무기와 인도 상류층의 배신, 분열 탓이다. 결정적으로 시크교도와 네팔 쿠르카 용병이 영국 편에 붙었다. 봉기 1년 만에 주요 거점을 잃은 인도인들은 유격전을 벌였나 1859년 4월 최후 저항의 불씨마저 꺼졌다.

세포이 항쟁을 겪은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통치에서 정부의 직할 통치로 지배 방식을 바꿨다. 1873년 빅토리아 여왕은 황제의 관을 두 개 썼다. 대영제국 황제 겸 인도 황제. 황제 밑에는 왕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 했을까. 변절한 인도 상류층이 영국에 붙어 호사를 누렸다.

인도의 경제는 더욱 망가졌다. 항쟁 이후 영국의 공업억제책으로 인구의 50% 수준이던 농민 비중이 75%로 늘어났다. 농민층의 증가에도 인도인들은 1890년까지 1,500만명이 굶어 죽었다. 독립 직후 파키스탄과 갈라진 것도,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시크교도 문제도 항쟁 이후 본격화한 영국의 지역과 종교ㆍ계층에 대한 이간·분열책 탓이다.

더욱 고약한 것이 있다. 인식과 사고방식까지 영국화한 것이다. 세포이 항쟁 발생 직후 6주간 한 줄도 보도하지 않던 영국 언론은 경쟁자였던 프랑스에서 사실을 알리자 보도를 쏟아냈다. 철저한 왜곡으로. 이옥순 인도문화연구원장(연세대 교수)의 저서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에 따르면 영국은 ‘인도인들이 고귀한 영국 여인들을 성폭행한다’는 보도를 연이어 올렸다. 여성을 내세워 세포이의 야만과 비겁을 강조한 영국의 논리를 이 교수는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간파한다. *** 여성을 잔인하게 다루는 동양에 대한 서구의 응징은 의무라는 등식이 더욱 굳어졌다.****



압제에 항거하던 인도 세포이 항쟁의 결과는 비극적이다. 인도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포이 항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오늘날의 인도는 내일의 세계를 주도하는 주역이다. 중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인구 대국,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무수히 나온다. 인도의 미래를 밝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영국 편에 섰던 사람들의 부귀영화일까. 세포이의 저항 정신일까.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 답이 있다. 네루에 따르면 영국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국민이었던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가장 뒤떨어진 보수적인 계급과 결탁했다…(중략)…영국인들이 우리 내부의 불화를 이용한다면 서로 싸우는 우리가 나쁜 것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757년 6월23일 인도 서부의 촌락 플라시에서 발생한 전투는 세계사의 변곡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인도의 지배권이 영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플라시 전투의 군세는 프랑스와 현지인 병력을 합쳐 5만명.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는 인도 병사 2,100명을 합쳐서 3,150명에 불과했다. 대포도 프랑스측이 53문으로 9문 밖에 없던 영국 측을 앞섰다. 결과는 참호전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영국의 승리. 영국은 이로써 인도 지배권을 굳혔다. 패배한 프랑스는 침략의 발길을 인도차이나(베트남)로 돌렸다.

플라시 전투는 경제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대의 면직공업국이던 인도는 이 전투를 계기로 영국 수출이 급격하게 늘어났으나 무역수지 방어를 걱정하던 영국은 인도 수탈과 산업혁명과 기술혁신 과정을 거쳐 면직 공업에서도 인도를 눌렀다. 세포이 항쟁은 100년 동안 참고 참았던 폭발이었다.

** 플라시 전투 이후에도 인도의 군사력은 영국을 압도했다. 6개 왕국으로 이뤄진 인도의 군사력은 영국 동인도회사 군대의 수십 배에 달했으나 항상 졌다. 분열됐던 탓이다. 인도는 ‘분할과 지배’ 정책을 교묘하게 악용한 영국에 늘 당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앞잡이였던 인도의 귀족들과 상공인들은 부귀영화를 누린 반면 인도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었다.

*** 동양인이 유럽 여성들을 농락한다는 성적 담론은 영국이 시초가 아니다. 근대 이후 구미 국가에서는 아시아인 남성이 백인종 여성을 성폭행하는 그림과 시, 소설을 쏟아냈다. 미국이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을 제정해 이민을 제한할 때도 문학과 예술은 정치적 수단의 전위부대였다. 이 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중국인들은 광산 개발에서 철도 부설까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았다.

**** 당시 영국 언론의 보도 성향은 서구가 동양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물론 세포이 항쟁 시기 인도인들의 영국 여성에 대한 폭행은 없지 않았다.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초대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에는 이와 관련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인도인들의 영국인에 대한 가혹행위를 맹공격했던 네루는 ‘인도인의 잔인함도 있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잔혹성은 훨씬 더 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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