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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천년제국의 탄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즉위 25주년 기념축제가 한창이던 330년 5월11일,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 장장 40일간 계속된 축제의 절정에서 도시 전체가 들떴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 건설 공사 완공과 겹쳤기에 기쁨이 더욱 컸다. 작은 변방이던 도시 규모를 4배로, 성곽 규모는 6배로 늘리는 대역사에 걸린 시간만 4년. 성 이레네 성당의 미사에 참석한 황제는 도시 이름을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다고 선언했다.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이다. *

수도를 옮긴 이유는 새로운 구심점을 원했기 때문. 3세기 후반부터 4~6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혼란을 친아들까지 죽여가며 수습하고 1인 체제를 구축한 마당에 새 출발의 상징이 필요했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에 말라리아가 들끓었다. 동부의 경제력이 로마가 위치한 서부를 능가했다는 점도 천도의 요인으로 꼽힌다. 페르시아 같은 동방의 전제군주 체제도 평생을 권력 강화에 매진했던 콘스탄티누스의 마음을 끌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오랜 수도였던 로마를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절대권력을 꿈꾸던 그는 공화정에 대한 향수와 원로원의 입김이 강한 로마가 싫었다. 임종(337년) 직전에서야 개종했지만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했을 만큼 종교를 정치와 통치에 적절히 이용했던 그는 다신교 숭배사상에 젖은 로마를 수도로 안고 있는 한 제국의 중흥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당초 천도 후보지는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 트로이 평원이었으나 비잔티움에 낙점이 찍혔다. 바다를 끼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선정이 뛰어난 덕분인지 제국은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오스만튀르크에 점령될 때까지 1,123년 18일을 존속했다. 예전의 로마와 달리 대외 정복에 전력을 다하지 않았어도 전성기에는 오늘날 그리스와 터키·이탈리아·스페인 서남부·불가리아·유고·시리아·이스라엘·이집트, 아프리카 북부 해안 전역을 아울렀다. 지중해 주변의 땅이 모두 제국의 영토였다. 융성과 쇠퇴를 거듭했어도 동서고금을 통틀어 단일 정치체제 아래 비잔티움 제국만큼 오랫동안 영속한 나라도 없다. **

비잔티움 제국을 오랫동안 지탱해준 요인은 경제력.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요충지여서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서유럽이 중세 암흑기에 빠진 채 화폐제도까지 무너졌을 때 비잔티움 제국이 발행한 노미스마(헬라스어, 라틴어로는 솔리두스) 금화는 제국이 유지되는 내내 높은 순도를 자랑하며 당시 알려진 세계의 기축 통화로 통했다. ‘중세의 달러’였던 셈이다.

처음부터 권문세가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자영농을 적극 육성한 점도 탄탄한 경제 구조를 만들었다. 로마제국 시절 권력자들의 대농장(라티푼디움)에 눌려 몰락했던 소규모 자영농이 다시 살아났다. 비잔티움 제국이 로마와 달리 적극적으로 정복 사업에 나서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농지를 떠나 전쟁터로 떠나기를 꺼리는 농민들이 병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존재는 우리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어떤 국가보다 컸다. 스스로 로마인이라고 인식하며 살았던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을 페르시아와 사라젠 제국,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지켜낸 최일선 방파제이자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보관창고였다. 근대의 씨앗을 뿌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운동도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년) 이후 피란 온 비잔틴 학자들에 의해 지펴졌다. 비잔틴이 화폐경제와 교역을 통해 발전시킨 비단·섬유산업은 서유럽으로 이식돼 종국에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기독교의 안식일(주일·일요일)도 비잔티움 제국을 세운 콘스탄티누스가 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과 러시아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국 초기 펼쳐진 삼위일체론과 단성론간 논쟁 끝에 이단으로 몰려 동방으로 쫓겨난 단성론의 아리우스파 교리는 무함마드가 세운 이슬람의 교리와 닮은꼴이다. 러시아의 생성도 마찬가지.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정교회의 승계를 표방한 슬라브 귀족들이 종교적 열망으로 뭉쳐 국가로 발전한 나라가 러시아다. 건국 초 러시아는 로마-비잔티움 제국을 잇는 ‘제 3의 로마’라고 주장하며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유럽의 빗장이며 문화의 저장고이자 자양분이었음에도 비잔티움제국은 망각의 대상이다. 왜 그럴까. 서유럽 중심의 사고방식 탓이다. 15세기 후반 이후부터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한 서유럽 특유의 우월감이 착시와 망각을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편향의 정도가 더욱 심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비잔틴 제국의 건국시기를 330년보다 6년 앞선 324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 태생의 유고슬라비아 사학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비잔티움 제국사(1940)’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비잔티움 제국 연구의 기본서로 꼽히는 이 책에서 게오르크 교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숙적이었던 동부 황제 리키니우스를 격파한 324년을 비잔티움 제국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로마를 재통일했기에 서로마보다 동로마제국이 진정한 로마의 후예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 고조선이 더 오래 지속했으나 단일 정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비잔티움제국의 존속 기간은 로마를 빼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정한 이후를 합산한 것이다.

*** ‘서구 안의 오리엔탈리즘(비서구권 비하)’으로 보일 만큼 서유럽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와 같은 시대를 살며 ‘로마제국 쇠망사’를 저술한 에드워드 기번의 영향이 크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영광을 강조한 나머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서는 폄하로 일관했다. 옥스퍼드 사전에 실린 ‘byzantine mind’라는 표현은 음모와 막후공작에 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다. 황제 자리를 지키려 아들의 눈을 찌른 비정한 어머니와 40세 연하의 10대를 골라 공동황제에 올린 미망인 황제의 권모술수도 있었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관심권 밖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15권짜리 ‘로마인 이야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은 극히 일부분만 나온다.

서구의 비잔티움 제국 폄하에는 다양성에 대한 시기심이 깔려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 외교관 출신의 역사학자인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지은 ‘비잔티움 연대기’에 등장하는 역대 황제들의 이름에는 로마인의 후예 뿐 아니라 그리스인은 물론 아랍계, 심지어 히브리계까지 등장한다. 서양 문물의 뿌리인 그리스의 영역에서 로마를 승계한 비잔티움 제국까지 아래로 보는 시각은 편견으로 가득한 오리엔탈리즘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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