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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몰락의 숨은 이유





질문 하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의 기계화 비중이 가장 컸던 나라는 어디일까. 독일군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아니다. 답은 미국과 영국. 미국은 식민지인 필리핀에서 1개 기병연대를 운용했을 뿐이다. 영국도 전쟁이 본격화하기 전에 기병대를 기계화부대로 바꿨다. 영연방에서 말을 전투용으로 사용한 곳은 인도기병연대 등 식민지군 일부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이 생길 법하다. 그렇다면 독일은?

독일군은 전쟁 초반 전차를 앞세운 신속한 돌파로 ‘전격전(電擊戰·Blitzkrieg)’이라는 신화를 남겼으나 오히려 말의 힘에 의존한 군대로 손꼽힌다.* 보병사단마다 말 5,375마리를 편제한 독일군이 전쟁 내내 부린 말은 약 275만 마리. 평균 110만 마리가 보급품은 물론 탄약과 대포를 운반하고 심지어 현대 미사일의 원조라는 V-1, V-2 로켓까지 날랐다. 왜 그랬을까. 연료가 심각하게 부족했던 탓이다.

지도를 떠올리면 독일의 연료 수급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중동의 유전이 세 곳에서만 발견됐던 당시 원유 매장지는 북중미와 소련, 루마니아와 보르네오 정도.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식민지를 모두 상실한 독일 국내에서도 기름이 솟지 않았다. 대신 석탄은 풍부했다. 독일 공업생산의 30% 이상을 차지한 루르 지방은 유럽 최대의 탄광으로도 이름 높았다. 독일 과학자들은 일찍부터 유연탄으로 눈을 돌렸다.

원유와 석탄의 성분은 기본적으로 탄소. 원유는 수소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독일인들은 석탄에 수소를 불어넣으면 기름으로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Friedrich Bergius)는 1913년부터 석탄을 먼지같이 부순 뒤 수소첨가물과 섞어 액화시키는 방식으로 합성석유(synthetic fuel)를 만들어냈다. ** 전쟁을 노리던 히틀러는 1933년 집권하자마자 석유 생산을 늘리는 방법부터 찾았다.

전쟁 직전까지 합성석유 생산공장 건설에 매진한 결과 독일은 연간 450만 배럴 생산시설을 갖췄다. 인공 석유공장으로는 세계 최대규모로 견줄 나라가 없었지만 전체 석유시장 기준으로는 말 그대로 조족지혈이었다. 1938년 미국과 독일의 석유 소비량이 10억 배럴 대 4,400만 배럴이었으니까. 전쟁 기간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국이 군사원조를 본격화한 1941년부터 종전(1945년)까지 유럽과 아프리카 전선의 연합국에게 제공한 석유만 약 60억 배럴.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용량은 13억 배럴을 밑돈다.

석유 부족은 독일이 승승장구하던 전쟁 초기에도 똑같았다. 1938년 합병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진군하던 독일군 2개 전차사단은 예비 연료도 없어 민간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서 썼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의 숨은 원인 중 하나가 소규모 유전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나마 기름이 없어 진격이 늦어지는 통에 독일은 폴란드 유전의 30% 밖에 못 챙겼다. 나머지는 폴란드를 나눠 삼킨 소련의 차지.

만성적인 연료 부족을 겪던 독일군이 영국 유럽원정군과 프랑스군을 꺾으며 순식간에 유럽 서부를 점령한 수법도 비슷하다. 탈취.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독일군이 전리품으로 챙긴 석유만 2,000만 배럴이 넘는다. 연료를 크게 잡아먹는 전격전으로 소비한 1,200만 배럴을 빼도 800만 배럴이 고스란히 남았다. 문제는 딱 여기까지가 정점이었다는 사실. 이탈리아를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파병된 롬멜 장군의 아프리카 군단은 가용 장비의 절반만 움직였을 만큼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반면 연합국들은 하루에 400만 배럴을 쏟아내던 최대의 산유국 미국이 제공하는 석유를 아낌없이 써댔다.

합성석유의 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승부처였던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에서 영국 전투기들은 미국이 제공하는 옥탄가 99 이상의 고급휘발유를 사용한 반면 독일 공군 전투기 연료는 옥탄가 87에 머물렀다. 양산을 위해 품질을 희생시킨 결과인 낮은 품질의 휘발유 때문에 독일 공군 전투기들의 런던 상공 체공시간은 길어야 15~20분에 불과했다. 공중전에서 밀릴 수밖에.

히틀러 최대의 오산이었다는 소련 침공도 석유자원 확보라는 차원에서는 이해가 가능하다. 루마니아 유전을 확보해 한숨 돌린 히틀러는 근처의 소련군을 꺼렸다. 더욱이 세계 2위의 산유국이던 소련 원유의 84%가 묻힌 코카서스 유전지대에 눈독을 들였다. 특히 전체 매장량의 72%를 차지하는 바쿠유전이 탐났다. 히틀러의 기대대로 파죽지세로 소련군을 격파하던 독일군은 예상하지 못하던 복병을 만났다.

연료가 부족하면 적의 보급품을 빼앗는다는 독일군 기갑부대의 눈물겨운 전통이 통하지 않은 것. 진격 속도가 워낙 빨라 소련군이 연료와 물자를 파괴할 틈도 없이 빼앗았으나 유종(油種)이 달랐다. 가솔린에 익숙한 독일군에게 소련군이 사용하던 디젤 연료는 그림의 떡이었다. 연료 부족 속에 동장군까지 만난 독일군은 수렁에 빠졌다. 전세는 이때부터 기울었다. 독일의 내리막길.

소련군에 밀려 루마니아 유전까지 내줬어도 독일은 기댈 구석이 있었다. 바로 합성석유 공장. 하루 생산량이 12만 4,000배럴까지 늘어난 합성석유는 독일군 전체 유류사용의 57%에 이르렀다. 항공기의 95%는 합성석유로 날았다. 일말의 기대도 잠시. 1944년 5월12일, 독일에는 절망이 찾아왔다. 미 육군항공대 *** 소속 B-17, B-24 대형 폭격기 886대의 융단 폭격으로 합성석유 대형공장이 쑥밭으로 변한 것.



피폭된 5개 도시의 생산시설을 돌아본 독일 군수장관 알버트 스피어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미군은 이날의 폭격으로 두 가지 목표를 다 이뤘다. ‘353 작전’이란 이름 아래 진행된 대규모 폭격의 첫째 목표는 대형시설 파괴, 두 번째 목표는 ‘합성석유 공장지대에 집중 배치된 독일 전투기들의 저항력 확인’에 있었다.

미 육군 항공대는 독일 공군의 저항이 거셀 것으로 보고 폭격기 편대에 모두 735대의 호위전투기(P-38 153대·P-47 201대·P-51 381대)를 딸려 보냈었다. 미군의 피해는 폭격기 46대, 전투기 7대 추락. 적지 않았어도 미군의 예상을 밑돌았다. 다음날부터 미군은 마음껏 합성석유 공장을 두들겨 팼다. 연료 생산시설을 폭격받은 독일은 더 극심한 연료 부족 사태에 빠졌다. 미국과 영국의 폭격기를 두 눈으로 보면서도 전투기를 띄우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연합군이 작은 합성석유공장까지 샅샅이 폭격한 통에 1944년 9월 항공연료 생산량은 4월 말 대비 6%에 불과한 하루 3,000배럴 수준으로 떨어졌다.

연료 부족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제트 전투기를 날릴 수도, 조종사를 훈련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6.6) 역시 합성석유 생산시설이 파괴되지 않아 독일 공군의 연료가 충분했다면 실패로 귀결됐을지도 모른다. 2차 대전 최후의 승부처인 벌지 대전투에서 독일군 기갑부대가 승리를 눈앞에서 놓친 것도 전차의 연료가 바닥난 탓이다. 결국 독일은 석유공장 피폭 1년 만인 1945년 5월 연합국에 손을 들었다. 일본의 패망 원인도 석유로 풀이할 수 있다. 일본은 기세 좋게 보르네오 유전을 점령했으나 유류 수송대책이 미비해 독일 이상의 연료 부족 사태를 겪었다.****

히틀러의 생명줄을 끊은 폭격 이후 석유의 중요성을 더욱 중하게 인식한 미국은 석유 패권 유지에 사활을 걸었다. 석유자원이 가장 많이 깔린 중동지역에 총성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아랍과 이스라엘의 대립과 더불어 석유 헤게모니를 둘러싼 각축 탓이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국은 유전 발굴과 대체에너지 개발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 중간도 못 된다. 석유 ‘자주’개발은 물론 ‘자주국방’ 구호에서 ‘자주’가 눈에 안 보인지 오래다. 동맹에만 점점 더 기대는 안보도 위험하고 아무리 저유가시대라지만 에너지는 치명적인 외통수다. 독일이 당했던 것처럼.

합성석유에 대한 관심 역시 그렇다. 언젠가는 필요해질 것이라는 인식 아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필두로 기술개발 전쟁이 한창이다. 석탄 액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기술까지 선보였다. 시장규모가 수백조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 어디쯤 있을까. 2030년까지 하루 10만 배럴의 생산시설을 마련한다는 청사진만 한 장 달랑 걸린 상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독일보다 말을 더 많이 운용한 참전국은 소련 뿐이다. 350만 마리의 말을 병참과 전투용으로 썼다. 독소전쟁 개전 직전까지 소련군은 코사크 기병을 포함해 약 80개 기병사단을 운용했다.

**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1884~1949) 이전에도 인공석유 추출 이론이 전혀 없지 않았으나 그의 연구결과는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합성 석유 추출 기술 고도화에 매달리던 베르기우스의 인생 정점은 1931년. 합성석유를 개발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조국 독일의 패전 이후 베르기우스는 목재의 사료 전환과 대용식 개발을 연구하다 1947년 아르헨티나로 이주, 2년 뒤 죽었다.

*** 중(重)폭격기는 당연히 공군에서 운용하는게 상식이나 당시에는 공군이 창설되기 전이어서 육군이 공군의 기능을 맡았다. 미 해군의 항공전력은 아직 남아 있어도 전투기와 지원기 중심이다. 오늘날 전세계를 통틀어 본격적인 전략폭격기를 대량 운용하는 곳은 1947년 육군에서 독립해나간 미국 공군 뿐이다.

**** 일본은 보르네오의 유전을 제대로 활용 못 했다. 첫째 이유는 철수하기 직전 네덜란드 기술자들의 파괴 탓. 두 번째는 미 해군의 잠수함대가 유조선을 비롯해 일본 상선대를 철저하게 격침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궁여지책으로 초대형 고무 튜브를 제작해 바지선으로 끌어오는 방법까지 동원했으나 모조리 실패하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조선을 더욱 짜냈다. 가정의 식기를 공출해가고 전투기의 기름을 만들겠다며 어린 학생들을 동원해 소나무의 송진까지 긁어갔다. 일제는 ‘소나무 뿌리 200개면 1시간 비행이 가능하다’며 조선의 산을 헤집었다. 조선의 송진은 어떻게 됐을까. 일제는 송진에서 뽑아낸 인조 기름 약 3,000 배럴을 최후의 자살공격용으로 비축해놓았다. 정작 종전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이 실험한 결과 연료로서 가치는 전혀 없는 것으로 판명났다. 시동도 걸기 전에 엔진에 달라붙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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