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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와 창문에도 세금을?





연간 예산 120만파운드에 세입 90만파운드. 왕정복고(1660년) 직후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살림살이다. 국왕과 의회는 머리를 짜냈다. 모자라는 30만 파운드를 세금으로 거둬야 하는데 세목(稅目)이 마땅치 않았다. 바로 한 세대 전에 왕과 의회 간 내전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도 있었다. 찰스 1세의 처형(1649), 공화정을 겪은 가장 큰 이유가 건함세 징수 등을 둘러싼 세금 갈등 때문이었으니까.

급해진 찰스 2세는 영국령 덩케르크를 프랑스에 팔았다.* 찰스 2세가 자존심을 버리고 덩케르크를 매각했어도 대금이라야 32만 파운드. 1년 예산 부족분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다. 결국 증세 밖에 방도가 없었다. 고민은 예외가 있었다는 점. 의회와 세금 갈등으로 아버지인 찰스 1세가 참수 당한 기억을 갖고 있던 찰스 2세는 일반인을 납세 대상으로 삼았다. 귀족과 왕당파가 장악한 의회도 이해관계가 맞닿았다.

돈은 필요한데 내 주머니를 열기는 싫었던 찰스 2세와 의회는 화로에 눈을 돌렸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7세기께 처음 도입된 이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반짝했던 화로세(Hearth Tax)법은 논란을 야기했지만 1662년 5월19일자로 통과되고 말았다. 찰스 2세는 당대를 주름잡은 경제학자의 도움도 받았다. 통계학과 경제학의 선구자이자 크롬웰의 심복에서 찰스 2세의 충신으로 변신한 윌리엄 페티가 법 제정에 앞장섰다.**

애덤 스미스 이전 시대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페티까지 나서 개발한 논리는 간단했다. ‘집을 소유하고 화로나 벽난로를 갖고 있으면 좀 사는 것 아니냐. 국가를 위해 세금 좀 내라.’ 왕정복고로 돌아온 국왕에게 충성 경쟁을 벌이던 일부 의원들도 ‘사람 수 세는 것보다 난로 숫자 파악하는 게 쉽다’며 거들었다. 변형된 재산세의 일종이었던 화로세 부과액은 화로당 2실링. 1년에 두 차례 나눠서 냈다.

요즘 가치로 430파운드(약 73만3,930원)라는 세액은 결코 작지 않았다. 세금도 ‘좀 산다고 하는 계층’에 부과된 게 아니라 벽난로나 화로를 갖고 있으면 빈부 가리지 않고 매겼다. 정작 실적은 신통치 않았다. 초기 징수액은 연간 10만~11만5,000파운드에 머물렀다. 징세관들이 화로를 헤아리기 위해 개인 집에 들어가 반발도 샀다. 사람들이 화로를 없애고 집안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통에 화재와 사망사고까지 잇따랐다.

화로세 징수액은 명예혁명 직후인 1689년 화로세 징수액은 21만6,000파운드까지 올라갔지만 민심을 얻으려는 윌리엄 3세와 메리 공동국왕은 세목 자체를 없애버렸다.

폐지 여부를 주저하던 윌리엄 3세가 결심하게 된 동기인 하원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화로세가 빈민들에게 부담이 될 뿐 아니라 국민을 노예화한다. 낯선 징세관이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 구석 구석 조사하는 행위에 반감이 심하다. 영국의 모든 신민은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쉴 권리가 있는데 화로세가 방해물이다.”

영국인들은 새로운 국왕의 선정에 환호했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국세수입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국의 당시 세입규모는 약 180만파운드. 20만 파운드를 걷어주던 난로세 폐지는 다른 세목 신설로 이어졌다. 결국 영국 의회는 1696년 말 ‘창문세(Window Tax)’ 신설을 의결했다. 창문세 부과의 명분도 화로세와 다를 게 없었다. ‘창문의 재료인 유리가 비싸니 창문 달고 사는 집이라면 돈 있는 것 아닌가. 세금 좀 내라.’



창문 수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자 바로 파장이 일었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난로를 부수고 화톳불을 때던 사람들은 창문을 없었다. 신축 건물에는 창문을 아예 달지 않았다. 건물들의 외형은 기형적으로 변해갔다. 세금보다 어둠을 택한 것이다. 조세 당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창문간 간격이 일정 기준보다 벌어져 있으면 별도의 창문으로 간주해 세금을 때렸다.

일시적으로 창문을 폐쇄했다가 다시 여는 행위가 적발될 경우 20실링의 벌금을 물렸다. 창문세는 1851년 주택세가 도입될 때까지 존속했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의 법칙’을 주창한 프랑스 경제학자 세이(Say)는 영국 여행에서 창문세의 폐단을 목도한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세금 비판론을 쏟아냈다. 창문세는 오늘날에도 어리석은 조세정책을 비꼬는 용도로 회자된다.

오늘날에도 영국에는 화로세와 창문세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성이나 고택(古宅)에 굴뚝이 없으면 17세기 후반 지었다고 보면 된다나. 창문이 거의 없는 고성이라면 신축 혹은 개축시기가 거의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중반까지 150여년 사이라고 보면 틀림 없단다. ***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화로세와 창문세는 어디에 쓰였을까. 런던 대화재로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고 뉴턴 같은 과학자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했다. 대양을 누빌 함대 건설과 아일랜드와 아메리카 식민지 유지에도 돈이 들어갔다. 부작용은 컸지만 재산세의 일종인 난로세와 창문세는 과학진흥과 제국 팽창의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19세기 영국은 더욱 다양한 세금을 만들었다. 사냥용 개에 대한 견세(犬稅), 수출입 상선에 대한 호송세, 헤어 크림과 의복에까지 과세하고 상속세와 소득세를 재산에 따라 매겼다. 근대 조세제도가 자리 잡는데 200년 이상이 세월이 걸렸다는 얘기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일부 사료에는 덩케르크가 유럽대륙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영국령이라고 소개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영국의 마지막 대륙 영토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고향’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 칼레다. 백년전쟁 패전으로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상실한 뒤에도 영국은 100년 넘게 칼레만큼을 유지했었다. 1558년 칼레를 프랑스군에 빼앗긴 뒤 꼭 100년 만인 1658년 영국은 덩케르크를 얻었다. 영국 공화정이 프랑스를 도와 스페인·영국 왕당파 귀족 연합군과 전투에서 승리한 대가로 양도받았다. 공화정이 얻은 땅을 왕정복고 후 매각했으니 찰스 2세는 체면을 구겼지만 주머니 사정이 급했고 덩케르크에 군사력을 유지할 자금도 딸렸다. 덩케르크는 중세 시대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페인, 프랑스가 물고 물리는 쟁탈전을 펼쳤던 도시로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에 밀렸던 35만 영국군이 살아서 도버해협을 건넌 ‘덩케르크 철수작전’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 윌리엄 페티의 대표저술인 ‘정치산술’(1690년 사후 출간) 형이상학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의 영역이던 정치경제학을 숫자와 중량, 척도가 중시되는 학문으로 바꾸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현대통계학·빅데이터의 원조로도 손꼽힌다. 애덤 스미스마저 혹평했던 칼 마르크스로부터 ‘근대 경제학의 건설자, 가장 천재적이고 독창적인 학자’로 평가받았던 페티는 아일랜드 측량에서 빈 땅을 찾아내 막대한 재산도 남겼다. 1782년 영국 총리에 올라 미국 독립전쟁을 뒷마무리한 윌리엄 페티 피츠모리스가 그의 증손자다.

*** 화로세는 뜻하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얼마나 악착같이 걷고 기록했는지 당시에 징세관과 징세대리인들이 기록한 정확하고 광범위한 문헌 자료는 어떤 사료보다 신빙성을 인정받는다. 인구와 주택 사정, 소득과 재산을 파악하는데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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