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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돈방석 그리고...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 무능하고 정권 유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선조에게 국제정세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세계지도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어떻게 활용했을까. 동쪽을 향해 달려오는 유럽 국가들과 통하려 애썼을까. 생전에 선조가 보여준 행태에 비춰볼 때 짐작이 어렵지 않다.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중국에 일러 바쳤거나 아니면 불태워 버렸거나. 그런데 그런 지도가 있었을까?

있었다. 53쪽 분량의 지도첩 ‘지구의 무대(Theatrum Orbis Terrarum)’. 세계전도와 지구촌 곳곳의 지도를 넣은 지도책인 ‘지구의 무대’에 딸린 해설은 국제정세까지 담았다. 세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는 존재했을 뿐 아니라 극동에도 흘러들어왔다. 행선지가 조선이 아니라 일본. 13~14세 가톨릭 소년들로 구성된 ‘덴쇼 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 團)’에 의해서다. *

이종찬 아주대 의대 교수의 ‘난학(蘭學)의 세계사’에 따르면 소년사절단이 선물로 받아온 유럽 지도책을 보고 일본 다이묘들은 충격에 빠졌다.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일본이 세계 전도의 귀퉁이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최고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경악했다. ‘지구의 무대’를 본 히데요시는 스페인과 아시아를 공동 경영하려던 계획이 안 먹히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

지도첩 ‘세계의 무대’에 어떤 내용이 실렸기에 그랬을까. 유럽에서도 ‘지구의 무대’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1570년 5월20일 발행된 초판(325부)은 주택 한 채와 맞먹는 가격에도 순식간에 동났다. 첫해에만 4쇄를 찍었다. 만 존 클라크는 역저 ‘지도 박물관(7명 공저)’에서 지도첩 ‘세계의 무대’는 세계를 책에 담은 최초의 서적으로 간주한다. 제작자는 애이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당시 43세).

초판본에 실린 세계지도는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북미대륙을 제외하면 정확도가 뛰어나진 않지만 온갖 정성을 들였다. 지도제작자 87명의 지도를 10년간 모으고 표준을 정해 한 눈으로 비교하고 판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도 뿐 아니라 각 지방의 지명 색인도 들어갔다. 일부 지도에는 경도와 위도까지 표시됐으니 아무리 비싸도 항해자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을 수 밖에.

무려 2절지(가로 86㎝, 세로 58㎝) 크기의 각면에 대형 지도 70점을 담은 그의 지도첩 초판은 라틴어로 제작됐으나 개정판이 거듭되며 7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오르텔리우스가 사망(1598년)하기 전인 1595년판에 처음 등장하는 한국은 섬으로 표시돼 유럽인들의 인식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개정판을 거듭할 때마다 새로운 지도와 그림이 추가되고 분량이 늘어난 ‘세계의 무대’는 1624년까지 46판 7,300부가 팔렸다.

해적판까지 합치면 당시 서구의 모든 선박에는 그의 지도책이 구비돼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지도제작자 오르텔리우스도 떼돈을 벌었다. 유럽에서 가장 번화했다는 엔트워프 중심가에 대저택도 지었다. 중요한 점은 끊임없이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며 추가로 투자했다는 사실. 요즘 기준으로 말하면 16세기형 기술 개발 및 투자 성공 사례인 셈이다.

유럽에 뿌려진 그의 지도첩은 호기심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탐험의욕을 자극해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을 낳고 종국에는 서구의 세계지배로 이어졌다.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과정이 반복된 결과다. 경제사학자 앵거스 메디슨의 추산에 따르면 16세기까지 유럽의 1인당 국민소득(PER GDP)은 평균 496달러로 중국의 600달러에 뒤졌지만 지도첩이 나온 후 역전됐다. 지도첩 ‘세계의 무대’가 세계를 유럽의 독무대로 안겨준 셈이다.



지도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미래 희망에 대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는 뛰어난 지도가 존재했었는지 의문이다. 반면 우리 주변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도 마테오리치가 전해준 세계지도를 일찌기 접했고 일본은 중국보다도 앞섰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가 나오기 69년 전인 1792년 나가사키의 한 학자가 제작했다는 세계지도는 오늘날 지도와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물론 네덜란드 지도를 보고 그렸겠지만.

비단 지도 뿐이랴. 습관과 구태, 아집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무능하고 집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선조의 분신들을 보는 것 같다. 경쟁의 시대, 사고의 깊이와 폭을 키우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다. 구슬 서말을 꿰어 보배로 만든 오르텔리우스처럼.

/논설위윈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대동여지도보다 69년 앞선 1792년, 일본에서 제작된 ‘지구전도’. 유럽인이 제작한 지도를 베껴 그린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세계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 ‘덴쇼소년사절단’은 1582년 일본을 출발해 유럽 각지를 돌아보고 1590년 귀국한 일본 최초의 서양 사절단. 일본 포교성과를 알리고 싶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기리스탄(기독교도) 다이묘(영주) 3명이 추진해 사절단 4명에 일본인 수행단 3명(1명은 성인 지도역, 2명은 소년 인쇄공), 통역을 맡은 유럽 사제단 5명 등 13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돌아올 때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도 같이 들고 왔다. 일본인 소년 사절단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펠리페 2세를 만나고 교황 그레고리 13세(그레고리 역법을 보급한 교황)까지 알현했다. 소년사절단을 통해 전설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일본이라는 존재가 서유럽에 각인됐다.

** 지도첩 ‘세계의 무대’와 국제정세를 보고받은 히데요시는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있던 스페인과 연합해 중국과 인도,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지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망상 어린 그의 계획이 틀어진 후 돌려진 방향이 조선 참략이었다(링컨 페인의 ‘바다와 문명:해양의 세계사’). 히데요시의 헛된 꿈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조선의 의병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꺾였다.

*** 오르텔리우스의 ‘세계의 무대’는 이전의 지도제작자 이름을 넣은 색인만으로도 역사적 가치를 평가받는다. 인명 색인 자체가 귀중한 기록인데다 색인에 오른 지도제작자 중에 상당수는 ‘지구의 무대’를 통해 업적을 남긴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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