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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독립전쟁





1568년 5월23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 주 헤일리헤를레이. 스페인 총독 알바 공작의 철권 통치에 반대해온 네덜란드 저항세력이 군사행동에 나섰다. 보병 3,900명과 기병 200명으로 구성된 저항군의 기습을 받은 스페인 군대 3,220명(보병 3,200명·기병 20명)은 바로 무너졌다. 스페인군의 3분의2가 죽거나 다친 반면 저항군 사상자는 80여명에 그쳤다.

헤일리헤를레이 전투는 서막이었다. 스페인의 압제를 피해 독일 지역으로 망명했던 오라녜공 빌헬름(오렌지공 윌리엄)이 모은 3개 침공부대의 일부가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것이다. 비록 한달 보름 뒤 스페인군과 전투에서 7,000여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어도 저항세력은 독립을 선언하며 세를 불렸다. 스페인은 이들을 얕봤다. 그럴만했다. 전세계에 걸친 광대한 제국에 비하면 한 줌 밖에 안됐으니까.

합스부르크가문이 지배하던 당시 스페인 제국은 유사 이래 최초로 전세계가 무대였던 거대 제국이었다. 유럽의 영토만 오늘날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남부와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서남부를 아울렀다.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체와 필리핀까지 영역으로 삼은 스페인 제국을 상대로 네덜란드는 80년을 싸운 끝에 독립을 따냈다.

프랑스 대혁명과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과 더불어 서유럽 4대 시민혁명의 하나로 손꼽히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바로 헤일리헤를레이 전투. 네덜란드 국가에도 이 전투에서 죽은 지휘관의 이름이 나온다. 기병대의 앞에 서서 전투를 치르다 전투 초반에 전사한 ‘나사우의 아돌프 백작’이 그 주인공.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인 오라녜공의 둘째 동생이었다. *

네덜란드인들은 왜 세계 최강인 스페인에 반기를 들었을까. 처음에는 반기가 아니라 읍소였다. 네덜란드의 국가 제 1절에도 저항세력이 충성심을 잃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문제는 스페인이 세금을 경감하고 보다 많은 자치권을 달라는 네덜란드 지역 유력자들의 청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 오히려 이들을 ‘거지’라며 내쳤다. 네덜란드 저항군 스스로 ‘거지 떼’라고 부르며 스페인제국을 괴롭혔다.**

결정적으로 스페인은 크게 세 가지 무리수를 뒀다. 첫째는 종교. 수차례의 정략결혼 끝에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을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무역상들이 대부분이던 신교도를 억눌렀다. 두 번째는 중과세였다. 당초 세율 100분의 1로 시작한 세금이 세목을 늘려가며 20분의 1, 10분의 1로 높아지자 가톨릭 지역까지 저항세력에 합류했다. 저지대의 17개주가 모두 독립운동에 들어갔다.

세 번째 실책은 배고픈 군대의 폭정. 발흥하는 오스만 튀르크는 물론 프랑스와 경쟁하던 스페인 제국은 군사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은보화(주로 은)를 갖고도 늘 군사비가 모자랐다. 네덜란드 독립군을 상대하는 스페인 병사들은 봉급이 끊기자 1576년 11월 앤트워프시 약탈에 나섰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는 앤트워프 약탈에서 무고한 시민 7,000명이 죽었다.

‘스페인군의 광기(Spanish fury)’라는 악명을 얻은 앤트워프 약탈 이후 남부의 상인들과 지식인들이 종교까지 바꿔가며 저항군에 힘을 보탰다. 마침 스페인의 ‘분리 후 지배(devide & rule)’ 전략에 따라 17개주의 대오가 무너지고 가톨릭을 믿는 남부가 독립운동을 포기했던 상황. 북부의 홀란드주를 제외하고는 인구의 대부분이 몰려 살던 남부의 수도나 다름없는 앤트워프가 짓밟힌 뒤 우수인력이 대거 북부로 떠났다.



힘을 얻게 된 북부는 17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사실상 국가로 인정받을 만큼 커졌다. 1648년에는 독일 30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마침내 국제적으로도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다.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제국과 싸우면서도 대외무역으로 황금기를 구가하며 세계 최고 부자나라로 자리 잡았다. 비록 독립과정에서 일찍 스페인에 굴복한 남부가 벨기에로 갈라졌지만.***

네덜란드의 비결은 또 있었다. 관용과 탈(脫)이데올로기.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었다. 기피민족이던 유대인조차 자유를 보장 받았다. 반면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금과 은에도 수차례 국가부도를 겪고 결국은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사라졌다. 종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삼은 결과다. 예나 지금이나 경직된 사고가 나라를 좀먹는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독립전쟁을 이끌던 오라녜공작 빌헬름은 1584년 스페인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총으로 암살 당한 역사상 최초의 유명 인물로도 기억된다. 독립전쟁의 신호탄인 헤일리헤를레이 전투에서 보병대를 지휘한 첫째 동생 루이는 1574년 모커르헤이데 전투에서 3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20살이던 막내 동생도 싸우다 죽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하던 가문의 4형제 모두가 독립전쟁에서 죽은 것. 오라녜공작 빌헬름이 오늘날까지 네덜란드의 국부로 추앙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 겉으로는 ‘거지떼’를 자처했으나 네덜란드 저항세력의 전력은 결코 거지 수준이 아니었다. 초반 육상전에서 밀릴 때마다 결정적으로 해상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바다의 거지떼’(독립군 해군)는 항해와 조선술에 모두 능한 무역상 겸 해상 전투세력이었다. 암살 당한 오라녜공 빌헬름의 둘째 아들인 나사우의 마우리츠는 군제 개혁으로 저항군을 유럽 최고의 군대로 만들었다. 마우리츠는 군대를 오히려 축소하고 적절하고 신속한 급료 제공, 우수 무기 지급으로 군대의 질을 높였다. 총포대가 교환하며 사격하는 방안을 창안하고 같은 군대에게 동일한 군복을 입힌 최초의 인물도 마우리츠다. 마우리츠 밑에서 근무하던 장교의 일부는 영국 내전에서 의회 편에 가담, ‘신형철기군’의 탄생을 도왔다.

*** 네덜란드는 독립 이후 ‘세계 최강’이라는 생각에 영국 등 어떤 나라와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감에서다. 네덜란드에서는 17세기 후반부 이후 로마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가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게르마니아에는 ‘바타비아인들이 갈리아족 중에서 가장 강하고 용맹하다’는 귀절이 나온다. 스스로 강하다며 전쟁에 빠진 뒤부터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1631년 암스테르담에 머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손쉽게 편리하고 진귀한 물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네덜란드 튤립의 땅, 자유가 당당한 나라·주경철 서울대 교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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