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이 8일 이례적으로 대국민 영상 메시지를 통해 생전퇴위 의사를 강하게 시사함에 따라 일본 왕실제도는 200년 만에 중대한 변혁에 직면하게 됐다. 전후 제정된 왕실 관련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에 관련 규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만큼 일왕의 생전퇴위가 실현되려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 절차와 다양한 후속 논의가 불가피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여성의 왕위계승 문제와 왕실의 역할, 개헌 등에 관한 갑론을박에도 다시 불이 붙을 것으로 예상되는 등 아키히토 일왕이 왕실은 물론 일본 정치권에 일으킬 파문이 작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왕은 이날 궁내청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동영상에서 자신이 일본 헌법에 규정된 ‘상징천황’으로서의 책무를 몸과 마음을 다해 수행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약 10분간 이어진 동영상에서 단 한번도 ‘퇴위’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생전퇴위 의사를 우회적이면서도 명백하게 밝힌 것이다. 일왕의 퇴위 의사는 이미 지난달 NHK 등 일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있지만 살아 있는 왕이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모습에 열도는 충격에 빠졌다.
세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왕실인 일본 왕실의 약 2,700년의 역사에서 생전퇴위는 적지 않았지만 일본이 근대화된 후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살아서 퇴위한 마지막 일왕은 에도시대의 고카쿠 일왕으로 그가 물러난 1817년 이후 지금까지는 종신재위를 원칙으로 해왔다. 현행 일본 헌법 2조에 따르면 일왕은 “세습에 의해, 국회가 의결하는 황실전범의 규정에 따라 계승”되지만 황실전범에는 생전퇴위에 관한 규정이 없다.
따라서 일왕의 생전퇴위가 실현되려면 우선 이를 허용하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다만 일본 정치권에서는 황실전범을 개정할 경우 일왕의 자유의사에 다른 퇴위가 아닌 강제퇴위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황실전범에 손을 대지 않되 아키히토 일왕에 한해 조기퇴위를 인정하는 특별법을 만드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생전퇴위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이번 왕실 관련 논의를 계기로 주목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여성’의 왕위계승 문제다. 아키히토 일왕은 퇴위 후 왕위를 서열 1순위인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이양할 뜻을 내비친 바 있다. 문제는 그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이다. 현재 나루히토 왕세자 이후의 왕위계승 서열은 나루히토의 동생인 아키시노노미야 왕자가 2위, 그리고 그의 아들 히사히토가 3순위다. 일본에서는 장자인 나루히토의 외동딸 아이코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은데다 현재 왕실에 아들이 귀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이미 2005년부터 황실전범을 개정해 여성의 왕위 승계를 허용해야 한다는 논란이 이어져온 만큼 이번 생전퇴위를 계기로 벌써 논란이 재연되는 형국이다.
일왕의 갑작스러운 퇴위 결정의 배경에 대한 논란 역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전후 평화주의를 상징하는 아키히토 일왕이 아베 신조 총리의 극우 행보에 제동을 걸기 위한 극약처방으로 퇴위를 결정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개헌을 통해 ‘전쟁 가능한 보통국가’를 지향하는 한편 일왕을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권한을 갖는 ‘국가원수’로 삼으려는 과거회귀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평소 평화헌법 수호를 중시하며 우익의 역사수정주의를 경계해온 일왕이 생전퇴위라는 초유의 정치 이벤트로 개헌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한편 생전에 자신처럼 평화주의 신념을 가진 나루히토를 옹립하고 여성의 왕위계승 문제도 매듭을 지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분석이다. /신경립기자 kls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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