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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무지의 리더십…잉카제국 멸망





1532년11월16일, 잉카 제국 온천도시 카하마르카. 아타우알파 황제는 오늘날 페루 북서부 지역인 이 곳에 머물며 왕족, 귀족들과 함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잉카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이복 형제와 내전을 치렀던 상황. 수많은 병력을 대동한 황제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의 면담 요청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피사로가 파 놓은 함정을 모른 채.

피사로는 화승총과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을 광장 곳곳에 매복시키고 대포 3문도 감췄다. 기병은 좀 더 멀리 떨궈 놓았다. 아타우알파 황제의 일행은 매복 지점으로부터 800m 떨어진 곳에 천막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피사로는 전령을 보냈다. ‘황제와 일행을 위한 만찬과 여흥이 준비되어 있으니 가능한 빨리 스페인 사람들의 숙소로 와 달라’는 미끼를 황제는 덥석 물었다.

아타우알파 황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신과 동등한 존재’인 자신을 누가 해칠 것이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황제가 거대한 가마를 타고 광장에 나타났을 때 피사로는 탁발 수사를 보냈다. 가톨릭의 성직자는 황제에게 ‘기독교로의 개종과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라’고 다그쳤다. 격분한 황제는 ‘우리는 누구의 속국도 되지 않는다. 나는 지상의 어느 군주보다 위대하다. 나는 신앙을 바꾸지 않겠다. 너희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바로 그 인간들에게 의해 죽었지 않는가’라고 외치며 성서를 내던졌을 때 피사로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산티아고! 돌격하라, 스페인 군대여(Santiago ycierra, Espana).’

숨겨둔 대포 3문과 화승총이 불을 뿜자 잉카인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황제는 현장에서 포로로 붙잡혔다. 비무장이라지만 아타우알파 황제의 수행원은 약 7,000여명. 피사로가 이끄는 병력은 기병 62명을 포함해 모두 168명에 불과했는 데 어떻게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을까.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 뛰어난 건축문화와 농사 기술을 가졌지만 무기류는 보잘 것 없었던 탓이다. 백인들이 못 보던 동물(말)과 함께 나타나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전설도 스페인에 대한 공포를 증폭시켰다.

사로잡힌 황제는 얼마 안 지나 스페인 군대의 진짜 관심사는 신(God)이 아니라 금(Gold)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황제는 피사로에게 ‘석방해준다면 감옥을 금으로 채워주겠다’는 제안을 건냈다. 황제와 피사로는 약속을 하고 공증까지 받았다. 황제가 갇힌 방의 밑면적은 518㎝×670㎝. 높이는 274㎝였다. 스페인 군대를 포위했던 8만 잉카 군대는 황제가 잡혀 있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옥에 갇힌 채 ‘금을 가져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전하는 스페인군의 지시에 따랐다.

약속대로 잉카인들은 전국의 유적을 뜯어 각종 금 장신구를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바쳤다. 피사로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금 장신구들을 무조건 녹여 금괴로 만든 다음 본국으로 보냈다. 약속도 지키기 않았다. 후환을 없앤다며 아타우알파 황제의 목을 밧줄로 졸랐다. 황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덕분에 화형이 아니라 교수형이라는 ‘은혜와 자비’ 속에 죽었다. 아타우알파는 죽어가면서 ‘환생과 복수’를 다짐했다지만 정작 황제가 사망하자 스페인군을 겹겹이 포위했던 잉카의 대병력도 자진해 흩어졌다.



잉카의 저항은 이후에도 약 40여년간 이어졌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200명도 안되는 서구식 병력으로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린 이 사건은 세계사의 흐름을 갈랐다. 11년 전 아즈텍 왕국을 무너뜨린 코르테스의 무용담과 피사로의 승전보가 맞물리면서 유럽인들의 탐험 열기를 자극했다. ‘황금의 땅’을 찾는 백인의 행렬이 늘어날수록 원주민들은 떼죽음을 맞았다. 강제노동과 수탈, 전염병 탓이다.

명저 ‘총·균·쇠’를 지은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피사로의 아타우알파 생포 사건은 근대사의 가장 큰 충돌’이라며 그 밑에 깔린 요인들이야말로 ‘유럽이 세계를 정복한 힘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잉카제국의 황제는 판단 착오와 오만, 그리고 무지(無知) 때문에 스스로 무덤을 팠다. 먼저 11년 전 아즈텍이 몰락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온 스페인 침략자들의 실체를 너무도 몰랐다. 아타우알파 황제는 ‘스페인인들은 전사들이 아니며 인디언 200여명만 보내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봤다. 더욱이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다고 여겼다. 침략자들이 몸 값만 받으면 자신을 풀어주고 가버릴 것이라고 믿는 무지도 몰락을 앞당겼다. 지도자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을 고루 갖고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은 잇따른 정복 사업에 성공하며 신대륙에서 들어 오는 금은보화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16세기 초반부터 17세기 초중반까지 신대륙에서 스페인에 유입된 금이 180톤, 은은 1만 6,000톤에 이른다. 스페인 경제는 쏟아지는 금은보화로 번영했을까. 그 반대다. 투자분석가 겸 금융사학자인 피터 번스타인의 ‘황금의 지배’에 따르면 스페인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온갖 전쟁에 끼어드는 통에 오히려 재정 고갈 상황에 빠졌다. 16세기 후반부터 스페인 국왕들은 무려 5차례나 지급 불능을 선언하며 푸거 가문 같은 유럽의 주요 은행들을 도산으로 몰아넣었다.

피사로의 약탈 역시 과거완료형이 아닐 수도 있다. 기득권 유지에 몰두한 채 각종 개혁을 거부하는 중남미 국가들의 백인 최상류층과 토지자본가의 대부분은 정복자의 직계 후손들이다. 빼내가는 구조도 여전하다. 도구가 총에서 금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남미의 외환위기, 그리고 아타우알파 황제가 보여준 오만과 무지의 리더십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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