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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의 ‘세상 사는 이야기’] 인간과 기술의 새로운 협업시대

<이 콘텐츠는 FORTUNE KOREA 2015년 12월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무리한 일정으로 목 근육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조차 힘이 듭니다. 하지만 기고란 것은 마감이 있는지라 어떻게든 약속된 시간을 맞출 수 있도록 방법을 고민해야했습니다. 잘 찾아보니 주변에 시리 Siri라는 멋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시리는 제가 사용하고 있는 사과 로고 회사의 랩톱 Fn키를 두 번 누르면 나타나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제가 말을 하면 순식간에 이를 문자로 변환해주는 마법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음성 인식 기술을 구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합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시리는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기능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이 많이 불편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번 기회에 시리를 한번 써보게 됐습니다. 그렇게 처음 사용해본 시리의 성능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이처럼 멋진 기능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시리는 그야말로 놀랄만한 수준으로 받아쓰기를 척척해냈습니다.

하지만 계속 사용하다보니 시리군(양?)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기에는 제가 너무 부족한 사용자임을 알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생활기록부 특이사항란에 ‘말이 빠름’이라는 선생님 의견이 기재돼 있을 정도로 오랜 습관인 제 빠른 말투가 문제였습니다. 시리는 혼란스러워했고 종종 오타를 냈습니다. 제 발음이 정확하지 못한 것도 시리에게는 상당한 시련이었을 겁니다.

습관을 바꾸는 일은 좀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닥치거나 큰 보상이 주어져야만 그 임계를 넘을 수 있습니다. 큰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요즘 나이 드신 분들이 한창 빠져있는 카톡 사용법 익히기가 적절한 예일 것이고, 한계의 경험은 지금 아픈 팔을 주무르며 시리를 이용해 기고문을 작성하고 있는 제 상황이 될 것입니다.

요즘 노인들은 손주와 대화하기 위해 카톡을 배운다고 합니다. 노년의 로맨스를 위해서도 카톡 사용은 필수라고 합니다. 문자로 주고받는 알콩달콩한 재미를 위해서입니다. 휴대전화 대리점에 들어선 노인이 “이 핸드폰 카톡 되는 겁니까”라고 물어봤다는 재밌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배경입니다.

노인들에게 스마트폰이니 앱이니 하는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설명들은 마치 에베레스트와 같이 거대한 난관으로 느껴질 겁니다. 노인들이 새로운 기기의 사용법을 익히는 일은 습관적으로 기피되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라는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기에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불굴의 의지가 생깁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이 ‘에로틱한’ 비즈니스의 도움을 받아 확산되는 사례가 반복해 생기는 것이겠지요. VTR이나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최근 확산의 기미가 보이는 VR 헤드셋 등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 아픈 팔을 주무르며 시리로 기고문을 작성 중인 제 상황을 보겠습니다. 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시리와 함께 원고를 작성하면서 제 행동에 조금 변화가 생긴 것을 눈치챈 것입니다.



저는 지금 말의 속도를 천천히, 그리고 가급적 발음을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시리가 제 말을 못 알아듣고 잘못된 입력을 하면, 이를 삭제하고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거든요. 저와 수십 년을 함께한 가족들이 몇 번이나 ‘말을 천천히, 정확하게 발음해라’고 타일러도 들은 척도 안 하던 제가 스스로 잘못된 습관을 제어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계의 경험은 저 같은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예제입니다.

요즘엔 습관을 바꾸게 하는 재밌는 장치들도 눈에 띕니다. 스마트폰의 건강 애플리케이션이 좋은 예입니다. 이 앱에는 하루에 몇 걸음을 걸었는지를 친구와 비교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사용자는 은연중 경쟁의식이 생겨 자기도 모르게 좀 더 많은 걸음을 걸으려고 합니다. 스마트폰 앱이 올바른 생활습관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전문가인 의사들이 활동량을 늘려야 한다고 아무리 지적해도 말을 안 듣던 사람들이 휴대폰 따위가 보여주는 숫자에 생활습관을 바꾸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위의 사례들처럼 효용 또는 한계의 제시와 주의의 환기를 통해 사람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일은, 인간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인간 적응(Human Adaptation)의 새로운 사례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유기체와 같이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해 왔습니다. 적응을 통해 생존의 확률을 높이고 생존의 토대를 넓혀왔던 것이죠. 하지만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는 구별되게도, 인간이라는 종만이 문화라는 시스템을 통해 모방하고 교류하며 창조해 ‘적응’ 그 자체를 새로운 차원의 것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좀 더 복잡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현재는 기술과 인간의 협업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멀리는 바퀴의 발명에서부터 최근에는 우주로의 외유까지 이전의 기술들이 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현재 또는 앞으로의 기술들은 일상 속에서 인간과의 세세한 협업을 통해 좀 더 고차원의 경험을 제공해 주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입니다. 이에 요구되는 새로운 적응 방식은 앞으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 글은 시리와 저의 아픈 팔이 함께 전반/후반 작업을 협업한 결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됐습니다. 이 작업은 어렸을 적 보았던 사이보그의 현실화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저와 시리의 협업이나 사이보그의 현실화 등은 우리 종이 좀 더 자유롭고 고차원적인 존재가 되어 존재를 확장하고 번영하기 위한 과정의 한 단편입니다. 유전자가 갈망하는 번영과 진화의 본능, 그 무한궤도 안에 현재의 우리가 있습니다. 습관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적응 기제를 인지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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