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이 없는 나라. 영국과 싸워 독립을 쟁취한 미국이 그랬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확인된 1785년 육군을 대거 감축하고 해군은 아예 없앴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다. 대륙(독립군) 해군이 독립전쟁에서 보유했던 함선은 모두 65척. 영국의 2,208척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랐다. 동맹인 프랑스 해군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대륙 해군은 한 줌의 전력으로 영국과 맞서느라 피도 많이 흘렸다. 종전시 불과 11척이 살아남았다.
연방 정부는 생존한 함선들을 민간에게 팔아넘겼다. 대륙 해군 함선치고는 최신형 프리깃이었던 ‘얼라이언스(USS Alliance)’는 군함 경매에서 2만6,000 달러에 팔렸다. 해군 폐지 이후 신생 미국은 1797년까지 밀수 감시나 연안 경비, 자국 무역선 보호를 민간 선박으로 구성된 예비대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연방 정부는 해군 예산 을아껴 다른 부문에 투자할 수 있었으나 문제가 생겼다. 미국 선박이 해적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독립 전쟁 이전까지 아메리카 식민지의 선박을 보호해 준 영국 해군 함정들도 미국적 선박을 들들 볶았다. 걸핏하면 정선 명령을 내려 미국인 선원들을 잡아가 영국 해군 수병으로 부려 먹었다. 독립전쟁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던 프랑스 해군이 전쟁 이후에도 공동의 적인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선박을 보호해줬지만 오래 못 갔다. 혁명의 회오리바람 앞에 놓인 프랑스는 다른 나라를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미국과 프랑스 혁명 정권은 오히려 나포 경쟁을 펼쳤다.
보호막이 사라졌어도 미국은 무역선을 유럽 지역에 열심히 보냈다. 담배와 면화 등을 수출하는 미국 선박들이 해상 약탈을 당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해군을 폐지한 1785년, 알제리 해적들에 의한 미국 상선 2척 나포를 시작으로 해상 약탈이 갈수록 늘어났다. 1793년 무역선 11척이 알제리 해적들에게 나포되자 미국 의회는 대규모 건함 계획을 세웠으나 열기는 곧 시들었다. 알제리 지배세력들과 평화조약이 체결되며 해군력 강화 주장도 쏙 들어갔다.
미국 정부는 이슬람 해적들에게 공물을 약속하고서야 아프리카 연안 항로와 지중해에서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지중해를 무대로 악명을 떨치던 이슬람 해적들의 요구는 점점 더 커졌다. ‘향후 15년간 해마다 100만 달러 규모의 공물’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연방정부 예산의 20%에 이르는 금액을 부정기적으로 내주던 미국은 참다 못해 1794년 해군을 부활하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알제리의 토호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뽑았다며 축하금 명목으로 22만 5,000달러 상당의 공물을 요구해왔을 때 미국은 더 이상 못 참고 정면 대응에 나섰다.
미 해군은 신형 함선을 주축 삼아 7척으로 원정 함대를 구성했으나 트리폴리의 이슬람 세력은 더 강했다. 함선 24척, 병력 2만 5,000명으로 외형에서는 훨씬 앞섰다. 초반 기습에 성공해 싸움 주도권을 잡은 미국은 1803년 말엽 위기에 빠졌다. 위력 정찰 에 투입된 신형 프리깃 필라델피아호(1,240t·건조비 17만9,349달러)가 트리폴리 항구에서 좌초한 것. 승무원들은 포로로 잡혔다. 위기 상황에서 원정 함대는 1804년 2월16일 저녁, 어둠이 깔리는 트리폴리에 특공대를 보냈다.
스티븐 디케이터 대위가 이끄는 80여 명의 특공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포로를 구출하고 적의 수중에 남게 될 필라델피아호도 폭파시켰다. 전황은 이때부터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해적들은 결국 1805년 무릎을 꿇었다. 트리폴리 해전으로 지중해의 골칫거리였던 이슬람 해적을 무찌르자 유럽 국가들은 미국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영국 해군의 호라이쇼 넬슨 제독은 ‘미 해군이 이 시대에 가장 용맹하고 대담한 전투를 치렀다’는 찬사를 보냈다. 로마 교황 비오 7세는 ‘유럽의 여러 나라가 그 오랜 세월 동안 건드리지 못 했던 이교도들을 신생 미국이 간단하게 징벌했다’고 추켜세웠다.
충분하지 못한 전력으로도 미국 본토에서 6,500㎞나 떨어진 적을 굴복시켰다는 자부심은 아직도 미 해군의 정신적 유산으로 내려져 온다. 독립을 쟁취한 뒤 최초의 해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해군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예산을 늘렸다. 독자적인 기술 개발에도 눈을 돌렸다. 식민지 시절부터 건립된 조선소가 확장되고 미국 범선을 사겠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삼림자원도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풍부해 조선산업은 건국 초기 미국을 대표하는 산업으로 뻗어 나갔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디케이터 대위는 해군의 추천으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에게 대령 계급장을 받았다. 25세에 대령이 된 디케이터는 아직까지 ‘미 해군 최연소 대령’ 기록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다. 주요 함정 함장을 거쳐 제독까지 승진한 디케이터는 41살 나이에 결투로 숨졌다.
**미국의 조선산업은 독립전쟁 이전부터 기술 수준이 높았다. 영국이 키웠기 때문이다. 영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기술 이전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나 조선업만큼은 예외였다. 영국 본토의 삼림 자원이 고갈됐던 상황. 전함 건조에 필요한 목재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은 안보와 재정 효율화 차원에서 식민지에 조선소를 세웠다. 식민지의 목재를 영국까지 운반하기 보다 현지에서 배를 건조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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