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이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요구한 판사회의 상설화를 전격 수용한 배경에는 안팎으로 거세지고 있는 사법개혁 요구에 대해 법원이 스스로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또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심의 결과를 내놓은 지 하루 만에 입장을 밝힘으로써 심각해지고 있는 ‘내홍’에 의한 상처도 하루빨리 봉합하겠다는 의도도 포함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다만 이번 사태의 발단인 ‘사법행정권 남용,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판사회의의 추가조사권한 위임에 대해 사실상 거절 의사를 밝혀 앞으로 내부적인 진통이 더 커질 가능성은 남겨뒀다.
28일 양 대법원장은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과 전국 판사들에게 보낸 e메일로 △전국판사회의 상설화 △법관 인사·평가 제도의 대대적인 정비 △법원행정처 개편 등을 중심으로 한 사법개혁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먼저 판사회의의 최대 요구 사안인 판사회의 상설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사법개혁의 주체를 법원으로 유지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법개혁과 관련해 국회를 중심으로 한 개헌 논의 등 외부의 압력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면서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양 대법원장은 이날 “법원 안팎에서 사법개혁의 필요성 및 방향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엄중한 상황에 실제 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광범위하고 깊이 있는 논의를 통해 사법의 역할과 바람직한 사법행정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은 더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며 내부개혁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기도 했다.
또 구체적인 개혁 방안에 대해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충분한 논의를 통해 합리적인 법관회의의 모습을 제시해달라”며 사법개혁의 주도권을 헌정 사상 처음으로 생기는 전국 단위의 상설 판사회의에 넘겼다. 그동안 법원행정처를 통해 법관 인사는 물론 사법 행정의 모든 부분을 통제해왔던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를 스스로 내려놓는 모양새다. 사법개혁의 걸림돌로 지목된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은 판사회의 등 다양한 사법부 내 통로가 생기면서 대폭 분산될 것으로 보인다.
양 대법원장의 이번 입장 발표로 법원 내부 갈등은 일단 잠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불만이 많았던 법원행정처 구성과 역할·기능 검토, 1심 재판 전면 단독화, 법관 인사 이원화, 법관 근무평정 및 연임 제도, 지역법관제, 사법행정권의 적절한 분산과 견제 등에 관해 판사들과 적극적으로 논의하겠다는 점에 일선 판사들이 크게 공감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법행정권 남용에 관한 추가조사에 대해 양 대법원장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나타내면서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의견도 있다. 판사회의가 추가조사 거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정 기미를 보였던 내홍이 더욱 커지고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장 임기가 이제 두 달밖에 남지 않았고 이날 입장 발표로 사법행정권 상당 부분을 내려놓은 만큼 반발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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